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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영화의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

허구로 짓는 진심의 집

단지 기억의 진실에 관한 영화였다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저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매력은, 실제와 허구가 뒤엉키며 존재하는 기억의 논리가 영화의 존재 방식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리얼리티와 맞물린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연기자가 ‘가짜 눈물’의 힘을 빌려 슬픔을 연기한다면 그 슬픔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그리고 그 가짜 눈물에 속아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감정은 진실인가, 거짓인가? 진실과 허구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해야 하는 영화의 운명.

파비안느가 리허설 장면에서 얼어붙은 이유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인 ‘카트린 드뇌브’가 자신과 유사한 입장의 파비안느를 연기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가 카트린 드뇌브이고 어디까지가 파비안느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실제의 배우와 가상의 인물이 혼재되며 구현된 형상을 만나는 것, 그럼으로써 영화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카트린 드뇌브를 캐스팅한 이유다. 영화의 허구적 인물은 언제나 실제 배우의 몸을 거쳐 관객과 만난다. 그렇기에 관객이 스크린에서 만나는 인물은 ‘실제의 것’과 ‘가상의 것’이 뒤엉킨 존재일 수밖에 없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영화 속 영화’의 구조를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구조를 통해 ‘내 어머니의 추억’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현실과 영화, 실제의 것과 가상의 것이 어떻게 뒤섞이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니까 파비안느는 영화 그 자체인 셈이다.

이미 죽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라가 파비안느의 삶의 한 편에 늘 존재해왔다는 사실은 가상의 것과 실제의 것이 혼재하는 영화의 특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이다. 파비안느가 엄마 역을 맡은 마농(마농 클라벨)과 리허설하는 장면에서, 파비안느는 “엄마 또 나만 두고 갈 거야? 살면서 기대되는 게 없어. 엄마는 여전히 젊은데. 엄마가 없으면 너무 외롭단 말야”라는 대사를 시작하며 순간 멈칫거린다. 파비안느가 순간 얼어붙을 때, 나는 그녀가 마농에게서 사라의 잔영을 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마지막 촬영에서 파비안느가 거울에 비친 마농의 다리를 보며 연기에 대한 영감을 얻는 장면도 그런 느낌을 준다). 실제로 리허설이 있던 날 밤에 파비안느는 꿈에서 이 상황을 다시 만나고, 사라가 남기고 떠난 옷을 꺼내본다. 리허설 장면에서 파비안느가 사라를 떠올렸다면, 그녀의 대사는 ‘내 어머니의 추억’의 엄마가 아닌, 늘 젊은 모습으로 자신의 삶 한편에 존재하는 죽은 사라를 향한 그리움이자 원망이다. 그런데 파비안느의 이 연기를 마주한 마농은 눈물을 흘린다. 파비안느의 연기에 대한 마농의 정서적 리액션.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 파비안느를 바라보는 마농의 표정에는 자신에게 깊은 정서적 울림을 준 파비안느에 대한 존경과 감탄이 담겨 있다. 파비안느가 그 대사에 진심을 담았다 해도, 그 진심의 대상이 마농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눈물(과 연기에 대한 감탄)은 어떤 ‘오해의 결과’다. 하지만 그것이 오해에 기반한다 하더라도, 마농이 느낀 감정을 가짜라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이는 허구로서의 영화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다. 영화는 허구지만, 그것으로 진심을 짓는다. ‘허구로 짓는 진심의 집’에 초대된 관객. 적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그렇다.

허구와 현실의 뒤엉킴

영화 후반부 파비안느와 뤼미르(줄리엣 비노쉬)가 화해하는 장면에서, 파비안느는 ‘왜 이런 감정을 안 쓴 건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연기를 탓한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장면에서 파비안느가 연기 연습을 하는 모습이다. 파비안느는 “엄마 딸로 살아서 기뻐요”라는 대사와 함께 에이미가 거짓말할 때의 손버릇을 연습한다. 그러니까 파비안느는 딸의 슬픔을 위로하던 그 순간에 상대방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하는 연기를 떠올린 것이다. 그런 파비안느를 보고 있자면, 그녀가 딸을 위로하며 한 말들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중요한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이 아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진심을 담기 위해 ‘무언가 지어내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뤼미르가 뤼크에게 사과하려는 파비안느를 위해 대사를 써주고, 딸과 화해를 권하는 자크가 파비안느에게 적절한 대사를 알려주며, 뤼미르는 파비안느를 기쁘게 하기 위한 대사를 샤를로트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진짜와 가짜, 지어낸 것과 실제의 것, 허구와 현실이 뒤섞여 존재하는 것은 영화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현실의 누군가가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 마디마디에 허구가 뒤섞여 있음을,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파비안느와 다르지 않음을, 그렇기에 결국 우리는 영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뒤엉킴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리얼리티’이다. 파비안느 가족처럼 허구로 짓는 진심의 집 덕분에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영화라는 마법

뤼크와 파비안느가 함께 찾은 레스토랑에서 파비안느를 알아본 손님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파비안느가 그들에게 화답하는 사이 뤼크는 그녀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본다. 파비안느가 보지 못한 그의 시선에는 늙어가는 파비안느에 대한 애처로움에서부터 여전히 빛나는 노배우에 대한 존경까지 여러 감정이 담겼다. 그 표정에 담긴 뤼크의 진심은 오로지 관객만이 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물의 진심을 곧잘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인물과 인물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객만이 그들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같은 장면에서 파비안느가 뤼미르에 대해 이야기하다 창밖을 내다보며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드러낼 때도 마찬가지다. 뤼미르는 파비안느의 진심을 보지 못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의 진심을 믿는 감독이다. 뤼크와 파비안느의 진심이 그러했듯,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직접 만날 수 없는 순간을 보여준다. <하나 그리고 둘>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표현을 빌린다면, 영화는 우리의 시선이 닿지않는 우리의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그렇기에 영화는 우리의 수명을 세배 정도 연장시킨다. 한마디로, 영화의 마법. 마법 같은 영화가 아니라면,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모두가 춤을 추는 장면의 행복감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볼 수 있었겠는가?

영화는 엔딩에서 영화의 첫 장면에서 던져진 질문을 반복한다. 천국에서 듣고 싶은 말에 대한 질문에 파비안느는 “비밀”이라 말한다. 그때 카메라는 천국에서 바라보는 듯한 부감으로 가족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하는 파비안느의 모습을 담는다. 파비안느의 비밀에 담긴 진실은 바로 이 카메라의 시선 속에 담겨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카메라의 마법을, 그 진실을 믿는다. 진실이 단편적인 사실의 나열이나 그 합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영화의 진실을 담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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