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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킹: 무법지대'의 관찰하는 카메라의 윤리를 묻는다

이 다큐가 없었어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이거 킹: 무법지대>(이하 <타이거 킹>)는 섬뜩한 정보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감금되어 사육되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야생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보다 많다. 미국에서만도 5천 마리에서 1만 마리 사이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는데, 야생 상태의 동물들은 기껏해야 3천 마리가 조금 넘는다. 동물원이 이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위험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동물들은 왜 감금되어 있는 걸까? 이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몇년의 시간을 투자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건 <타이거 킹>이 올바른 작품이었다면 갔어야 할 길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리즈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종종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휩쓸려간다. <타이거 킹>이 끌려간 건 이 작품의 타이거 킹인 조 이그조틱이다. 동물권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의 열광적인 애호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옮겨가더니 결국 그들 중 가장 미치고 정신 나간 인물의 캐릭터에 빠져버린 셈이다. 조 이그조틱은 여러 면에서 끔찍한 인물이지만, <타이거 킹>에서 이 남자가 저지른 가장 나쁜 일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에게 가야 할 관심을 빼앗은 것이다.

조 이그조틱의 공범자처럼 보이는 제작진

시작은 논리적이다. 제작진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을 기르는 사람들을 찾는다. <타이거 킹>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조 이그조틱은 G. W. 동물원이라는 사설 동물원을 운영 중이었다. 조 이그조틱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 애호가들의 불쾌한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인물로, 이들의 대표로 내세우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의 방식’이라는 이유를 들어 사육되는 동물들을 학대하는가. 어떻게 이 동물들은 어린 시절 장난감처럼 취급되다가 자라서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은근슬쩍 사라져버리는가. 어떻게 이 동물들은 이 남자들의 남성성 과시와 섹스를 위해 이용되는가.왜 미 정부는 이들의 동물 학대를 방치하고 있는가. 조 이그조틱의 이야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조 이그조틱이 이들 다큐멘터리팀이 쉽게 다룰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 남자는 극단적인 ‘어텐션 시커’(attention seeker), 즉 관심 종자로,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동성애자인 레드넥(백인저학력계층)이라는 희귀한 속성은 타고난 것이니 이건 어쩔 수가 없다. 폴리가미(복혼제)야 개인의 선택으로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대형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집착은 심각하게 유해하지만 그게 없었다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었을 테니 그냥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면서 조 이그조틱은 조금씩 선을 넘는다. 여기서 선을 넘는다는 것은 동물원의 동물들에게 가야 할 관심을 자신이 독점한다는 뜻이다. 조 이그조틱은 선거에 나가고 살인청부를 하고 사기를 치고 결국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남편 한명은 자살한다.

시리즈가 중반을 넘기면서 우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조 이그조틱은 원래 그런 놈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주인공이 되지 않았어도 이 정도로 폭주했을까?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었고 카메라 앞에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를 극단으로 몰지 않았을까? 과연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인물을 그냥 지켜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실제로 다큐멘터리는 어느 정도 단계를 넘으면 조 이그조틱의 공범자처럼 행동한다. 여기서 가장 노골적인 부분은 조 이그조틱의 적수인 빅 캣 레스큐의 캐럴 배스킨을 다루는 방식이다. 캐럴 배스킨 역시 자극적인 과거가 있는 인물이다. 그중 가장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은 전남편이 수상쩍은 상황에서 실종되어 사망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평한 척하며 조 이그조틱과 캐럴 배스킨의 갈등을 일대일로 다루는 것은 결코 보기만큼 공정하지 않다. 빅 캣 레스큐라고 문제가 없는 단체는 아니지만 조 이그조틱의 만행과 비교할 바가 아니고 대형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결정적인 입장 차이가 있다. 빅 캣 레스큐와 캐럴 배스킨은 대형 고양잇과 동물의 개인 소유를 반대한다. 그리고 <타이거 킹>이 온전한 정신의 다큐멘터리라면 가장 주목했어야 할 부분도 캐럴 배스킨이 전남편을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다(제작진은 캐럴 배스킨에게 구출된 고양잇과 동물들을 모두 안락사시키는 게 동물권 차원에서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고 한다. 이들의 동물권 감수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대형 고양잇과에 미친,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는 주제에 넋이나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은근슬쩍 건너뛴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필요 없다고 안락사되었을까.

다큐멘터리라기보다 리얼리티쇼에 가까운

그 결과 완성된 작품은 진지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리얼리티쇼에 가깝다. 모든 이야기가 조 이그조틱의 캐릭터와 드라마에 맞추어지고 재단된다. 진실보다는 선정성이 더 중요하다. 심지어 조 이그조틱의 모습도 상품화를 위해 검열된다(제작진은 이 남자를 더 소비하기 쉬운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욕설을 교묘하게 잘라냈다). 캐럴 배스킨은 제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빼앗긴 채 국민 악녀가 된다. 법률 전문가들이라면 이 시리즈가 제시한 의혹이 보기만큼 수상쩍지 않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봐도 조 이그조틱은 악당이 아니냐고? 하지만 <타이거 킹>을 본 시청자들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오로지 이 남자의 캐릭터성에만 반응한다. 조 이그조틱으로 분장한 채 호랑이 인형을 안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배우 재러드 레토를 보라. 레토는 심지어 이 미친 짓에 동조한 유일한 연예인도 아니다. 조 이그조틱을 사면할 생각이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물었던 인터뷰어를 보라. 이들에겐 범죄의 심각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도 어딘가에서 감금되어 고통받고 있을 수천 마리의 호랑이와 사자들은 잊힌다. 아니, 아주 잊히진 않았다. 중간중간 언급되다가 마지막회 끝에 10분 정도 시간을 내 마무리를 짓긴 한다. 하지만 끔찍하고 추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가치도 없는 남자가 주는 자극적인 재미에 휩쓸려 이 주제는 묻힌다. 아무 SNS에 가서 ‘타이거 킹’을, ‘조 이그조틱’을, ‘캐럴 배스킨’을 검색해보라. 대부분 시청자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심 종자로 태어나 그렇게 죽을 운명인 조 이그조틱은 자신에게 주어진 15분의 명성을 즐기며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