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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야케 쇼가 담아낸 것과 그것을 위한 시간에 대하여

밤과 낮, 그리고 그사이의 새벽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중반부엔 뜻밖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청춘의 활기로 스크린을 감전시켜놓는 클럽 신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세 인물은 밤이 되면 한데 모여 취하고 웃고 떠들며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지만, 낮이 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사치코는 저마다의 노동을 한다. 실업 상태인 시즈오는 집안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실은 시즈오의 일상은 단편적으로만 비쳐지기에 우리로서는 그의 일상을 모두 직조해볼 수 없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시즈코의 일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만, 한낮에 시즈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한낮의 시즈오는 어디에 찍힐지 모를 유동하는 점과 같다. 가령 그는 직선으로 뻗은 길 위에서조차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걸어간다. 특히 클럽 신 이후에 나오는 장면들에서 시즈오는 관객으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곳에 불쑥 들어가있다. 시즈오가 보고 있는 사진들과 재봉질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능숙한 손길로 가늠해보자면 모자를 만드는 작업실인 듯한데,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몇 장면들로는 시즈오가 어떤 연유로 그곳에 있는지 이 장인과는 어떤 관계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다.

밤과 낮의 정취

그럼에도 이 신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외려 정다워보이는데 시즈오에게는 이 공간이 몹시 친숙한 것 같아 영화가 시즈오를 따라 마실이라도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나’와 사치코, 시즈오가 한데 모여 서로에게 활발히 반응하는 밤의 순간들을 기민하게 포착하면서도, 낮 동안은 이리저리 움직여가는 개별 인물들과 동행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홋카이도의 항구도시 하코다테시의 어느 장소로든 이동해나간다.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움직여 나가든 세 인물은 영화의 세계 안에서 연결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인물의 관계도를 채 파악할 수 없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인물들의 동선과 카메라의 이동선과 시선의 방향에 의해 세 인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이어지기 시작하고, 그 선들은 조금씩 모양은 변할지언정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우선은 세 인물, 세 점이 모이는 밤과 거리를 두고 이어지는 낮, 그리고 그사이의 새벽에 대해 조금 더 분별해볼 필요가 있다. 클럽에서 술과 음악에 육체를 오롯이 내맡겼던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푸른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한다. 한밤의 들뜬 기운을 소진시켜야만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동하곤 하는 청춘들의 특권적인 시간이 셋이 걸어가는 길 위에 흩어져간다. 전차 안에서 새 아침을 맞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졸고있는 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들 사이에 감도는 술기운과 피로감이 스크린 너머까지 전염되어온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 한편에선 술기운을 동력 삼아 솟아오르는 출처 모를 용기와 세상 뭇 사람들과는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것 같아 미묘하게 찾아드는 우울함과 부끄러움이 뒤엉켰을 테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울렁이는 와중에도 우선은 내 한몸 뉠 수 있는 침대를 향해 달음질쳤을 것이다.

“동시대의 청춘이 가진 어떤 속성보다는 보편적인 청춘을 담아내고 싶었다”던 미야케 쇼가 말한 ‘보편적인 청춘’의 정수는 이 푸른 새벽에 있는 것 같다. 물러가는 밤과 새롭게 깨어나는 아침 사이에서, 채 가시지 않은 흥취와 각성과 무력감을 오가는 새벽. 몸속에 흐르는 알코올 성분의 위력과 새벽빛의 정취를 느끼며 수많은 이들이 이 시간 안에 깨어 있었고, 또 다른 젊은이들이 그 시간을 지나쳐간다. 그러니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상황과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동시대의 청춘이 가진 속성’에서 보자면 세 인물의 새벽은 유예된 아침이지만, ‘보편적인 청춘의 속성’에서 보면 수많은 청춘들이 괴력을 발휘하며 지탱하는 시간이다. 물론 청춘들의 새벽을 개념적으로 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은 무용할뿐더러 이 영화 자체를 외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놀듯이 만든 것 같은 이 영화가 빛과 장소들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힘들이지 않고도 우리를 육박해오는 지점들을 눈여겨볼 필요는 있다. 이 영화가 시대상을 성실히 반영하면서도 저마다의 미학적 성취를 이뤄낸 일본영화 작가들의 작품들과 얼마간의 친연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 목록에 위치할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영화는 지난해 개봉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일 것이다. 또는 이시바시 시즈카가 주인공이었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일 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 작품보다 더 가까워 보이는 영화는 이가라시 고헤이의 <밤비 내리는 목소리>(2008)와 <연인처럼 숨을 멈춰>(2014)다. 이가라시 고헤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깨어 있는 상태로 밤을 보낸다. 오래된 실직자도, 새해를 앞두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공장 당직자들도, 하물며 아버지의 인기척에 잠에서 깬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밤>(2017)의 작은 아이도 저마다 배회한다. 밤의 세계 안에서 그들의 배회는 때론 놀이로 바뀐다. 그들은 또 배회 중에 절절한 마음으로 누군가와 껴안기도 한다. 세 작품은 저마다의 이야기와 불안을 다루고 있지만 세 작품 모두 밤과 낮의 정취를 아주 예민하게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취를 품은 풍경 속에서 인물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제스처를 끌어내면서도 장소와 인물들 사이에 어떤 장력이 일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 시간 그 장소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물들의 제스처에 긴밀하게 반응하는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미야케 쇼 역시 이가라시 고헤이와 비슷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카페 뤼미에르>와 <남국재견>

그런데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속의 풍경을 들여다보고있으면 또 다른 이름도 떠오른다. 자꾸만 이 영화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시즈오가 모자 장인의 작업실에서 옛 사진들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카페 뤼미에르>(2003)의 요코(히토토 요)가 장웬예의 사진을 보는 장면이 생각나서 계속해서 감돌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시즈오가 요코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자주 스쳐갔던 영화는 <남국재견>(1996)이다. 아마도 두 영화의 세 주인공이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거다. 무엇보다 <남국재견>의 첫 장면에서 보이는, 세 꼭짓점을 찍고 있는 세 인물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그 비상한 장면들의 감흥이 <너의 새는 노래할 수있어>를 보면서 희미하게나마 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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