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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가 가족에 대해 던지는 질문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침입자>의 서진에게서 잔뜩 짐을 싣고 힘겹게 걸어가는 노새가 떠올랐다. 측은했다. 그러다, 참 나와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어 말풍선을 지웠다. 아내가 <씨네21>을 읽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침입자>

폐허 위에 짓는 집

손원평 감독은 다시 한번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침입자>는 어린 오빠가 여동생의 손을, <아몬드>는 엄마가 아들의 손을 놓친다는 차이가 있다 해도, 이 두 작품 모두는 오랜 시간 함께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가족에게로 돌아오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이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라면, 그 시간을 잃어버린 그들은 온전히 가족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동일하지만, <침입자>는 <아몬드>보다 가족에 대해 훨씬 더 비관적인 느낌을 준다. <아몬드>가 희생과 공감의 힘을 빌려 가족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끝맺는다면, <침입자>는 무너진 가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 <아몬드>가 희망의 이야기였다면, <침입자>는 근심의 영화다. 이는 <침입자>가 침입한 자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누군가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터 위에 남겨진 자에 대한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폐허 속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까, 하는 근심.

거실의 침입자

공간에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서진(김무열)은 이 대사와 함께 영화를 시작한다. 손원평이 <침입자>의 공간을 연출할 때 가장 공을 들인 장면들은 주로 거실과 주방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공간들은 개인이 아닌 가족이 공유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이 공간만큼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와 그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소는 없다. 가령, 처음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테이블의 꼭짓점에 위치한 이는 서진의 아버지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는 유진(송지효)의 몫이 되어 있다. 인물 배치를 통해 권력관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것은 홈인베이전 영화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연출 방식이라 해도, <침입자>의 거실만큼은 그 상투성을 넘어서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 장면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화사한 빛이 들어와 거실을 포근하게 감싼다. 아버지 옆에는 젊은 가정부가 앉아 있고, 어머니 곁에는 물리치료사인 남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 왼쪽에 유진이 서서 화분에 물을 준다. 화목한 가정을 표현할 때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는 이 거실 장면은 영화의 그 어떤 장면보다 섬뜩하게 느껴진다. “소파가 놓인 1층 거실에 서진을 제외한 모든 거주자가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은 감시의 전환을 명시한다. 서진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가족들은 마치 서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듯 각자의 위치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는 김소희 영화평론가의 지적(<씨네21> 1259호)처럼, 이 장면은 서진의 시선에 노출되기 위해 연출되어있다. 이 장면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줄 만큼 연극적인데, 서진이 관객의 시선을 매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관객의 시선을 겨냥한 과시적 연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입자>는 멜로드라마에서 화목한 가족을 연출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 배치와 미장센을 사용함으로써, 그 전형적 구도 안에서 서진 가족에 잉여처럼 달라붙어 있는 ‘이물질’을 더 도드라지게 한다. 달리 말해, 이 장면이 섬뜩한 까닭은 단지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끌어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익숙한 만큼 섬뜩하다. 결국 이 장면의 연출자로서 유진은 전통적인 가족의 판타지를 완성하는 데 일조했던 시각적 구도와 배치를 역으로 활용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흔들고 그 제도의 취약성을 들춰낸다. 흥미로운 것은 서진이 이들 앞에 등장할 때인데, 이 순간 그는 가족의 일부가 아니라 가족의 화목함을 무너뜨리는 침입자처럼 보인다(이 장면 앞뒤에는 서진이 아르바이트 연기자와 만나는 장면과 유진의 정체를 폭로하는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가족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자가 가족을 침입하는 자로 전락하는 아이러니와 기묘함.

유진과 그 동료들은 가부장제로 흔히 불리는 전통적인 가족의 허약성을 물질적으로 구현한다. 공유의 공간인 거실만큼 가족의 허약성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곳은 없다. 그것이 거실이라는 공간의 목표다. 영화 후반부 쇠약해진 부모의 투숏이나 좀비처럼 어슬렁거리며 아버지가 등장하는 곳도, 가족을 사이에 두고 서진과 유진이 힘을 겨루는 곳도, 심지어 가족의 의심 속에 서진이 형사에게 검거되는 장소도 바로 이 거실이다. 그때마다 손원평은 거실의 분위기를 바꿔가며 그 변화를 전시하듯 보여준다. 서진은 단 한번도 이 구도의 일부로 자리하지 못한다. 그는 영화 내내 거실의 주인이 되지 못하며 그 주변을 겉돈다. 서진은 새로운 거실의 질서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른다. 결국 <침입자>는 1층과 2층으로 표상되는 계급적 상승과 하강의 영화가 아니라, 이 거실을 연출할 수 있는 권력 또는 이 연출된 장면의 일부로 자리할 수 있는 자격을 두고 대결하는 영화다.

자궁 없는 자의 자궁의 병

손원평의 연출이 장르적 상투성에 가로막히고 지나치게 안전한 서사적 진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 속에서 <침입자>가 가지고 있는 미시감(jamais vu)의 매력을 발굴하는 것 역시 중요한 비평적 작업이라는 생각이다. <침입자>는 표면적으로 새로운 것보다 전형적인 것으로 가득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익숙한 것들 속에는 낯선 것들이 함께 흐르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환하게 빛나던 거실 장면도 그런 면이 있지만, 이러한 특징은 서진의 역할에서 두드러진다.

영화 후반부에 서진의 의심이 망상의 결과가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의 히스테리적인 의심은 영화의 서사를 전개시키는 기본 동력이다. 그렇기에 서진이 경험한 사건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행동에 내재한 과잉의 실체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 서진은 훌륭한 집을 짓는 건축가이지만 가정을 꾸리는 데는 실패한 인물이다. 유진은 서진이 한 가족의 가장이자 장남으로서 실패한 지점에서 가족을 장악한다. 서진의 히스테리적인 망상은 자신이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실패자라는 것,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가 되어간다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역할이 무용해지는 것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실제로 서진은 가족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려 하면 할수록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 마치 1940~50년대 필름누아르 장르의 팜므파탈이 그 시대의 남성 불안의 징후였던 것처럼, 유진 역시 서진의 징후인 것이다.

<침입자>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여성감독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 또는 예상과 달리) 여성의 관점에서 가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입장에서 지금의 가족을 바라보고 그 취약성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부장제의 비합리성을 통과하는 인물은 유진이 아니라 서진이다. <침입자>가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비틀대는 서진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침입자>에서 내가 가진 궁금증 중 하나는 다양한 관계 중에서 왜 하필 집에 돌아온 여동생을 질투하는 오빠를 서사의 중심에 놓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언니와 동생, 형과 아우, 누나와 동생도 아닌 오빠와 여동생의 대결 구도.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은 서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빼앗긴다. 결국 <침입자>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과도한 의무감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히스테리이자, 여성에게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안절부절 못하는 한 남성에 대한 서사다. 서진의 의사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리적 텃세’에 관한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서진의 텃세는 자신의 역할을 여동생에게 빼앗기는 것에 비례해 점점 더 가속화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화를 아주 오랫동안 보아왔다.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며느리를 질투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영화들. 지금까지 가족 안에서 그 심리적 텃세의 역할은 주로 여성의 몫이었지만, <침입자>는 그 역할을 서진에게 옮겨온다. 또한 서진은 장남이자 아버지이고, 또 딸이자 어머니여야 한다. 그는 그 역할이 동시다발적으로 부여될 때마다 우왕좌왕한다. 싱글맘이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함께하며 겪는 온갖 고초는 이제 서진의 몫이다. 구석구석 얻어맞으며 그로기 상태에 몰린 복서처럼 보일 정도다. 이처럼 <침입자>는 여성이 담당했던 서사적 역할을 남성에게 이동시키면서 가족에 대해 질문을 던지려 한다. 일반적으로 가부장제는 남성의 언어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졌고 그렇기에 여성들의 언어와 욕망은 언제나 그 세계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진이 장악한 가족의 세계에서 의심받는 것은 남성의 언어다. 그가 가족을 지키려는 모든 말과 행동은 유진의 세계에서 무력해진다. 영화의 초반에서부터 유진이 그리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서진의 의심이 충분히 합리적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그리 믿음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유진의 말처럼, 가족을 위해 그토록 애쓰는데도 아무도 서진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가족이라는 버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측은한 노새다. 히스테리(hysterie), 그러니까 ‘자궁(hystera)의 병’은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의 언어와 욕망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탓에 몸의 증상으로 표출되는 현상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침입자>는 그 증상을 남성의 몸으로 옮겨놓는다. 자궁 없는 자가 자궁의 병에 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영화, 그것이 <침입자>다.

폐허가 된 환상 뒤에 남겨진 근심

<침입자>는 서진의 가족에 대한 헌신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무인지, 죄의식인지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질적인 관계의 집합이 가족의 실체일 테니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서진의 가족은 이미 죽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서진은 그 살아 있는 시체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집에 대한 질문을 받은 서진이 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 것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가족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무엇이 자신의 역할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내의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서진의 기억이 온전해졌을 때, 그가 되살아난 과거를 통해 마주하게 된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질문 하나다. 아내(또는 가족)가 자신에게 원한 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질문과의 만남. 아내의 죽음은 이 질문에 대해 서진의 삶이 오답이었음을 증명한다.

<침입자>는 또 다른 오답으로서 (사이비) 종교를 이야기한다. 서진의 아내나 어머니가 종교에 빠진 것은 동일한 이유에서다. 그들은 결핍에 시달린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 역시 찢겨진 채로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가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그 결핍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서진의 어머니는 유진의 등장 이후 더이상 종교 생활을 하지 않는다. 결핍을 가리는 스크린/환상이 종교에서 가족으로 대체된 것일 텐데, 이는 종교와 가족 모두가 ‘맹목적 믿음’의 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손원평은 가족을 종교와 동일선상에 위치시켜 가족에 내재한 맹목성에 대해 질문한다. 유진에 대한 서진 부모의 믿음이 99.99% 일치하는 과학적 사실에 기초한다 해도, 그들이 유진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까지 부인하는 모습에는 비합리적인 과잉이 내재해 있다. 물론 이는 서진 부모뿐만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반적인 태도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가족이 종교와 동일선상에 위치할 수 있는 이유다. 즉, 맹목성의 관점에서 볼 때, 서진 부모가 유진을 딸이라 믿는 것과 유진이 사이비 종교 집단과 그 교회를 집이라 믿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다.

손원평은 자신의 장편소설 <아몬드>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괴물’ 로 취급받는 두 소년을 통해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준 바 있다. ‘공유하는 시간의 부재’가 피로 연결된 가족에 파행을 일으키면서 극적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몬드>가 ‘공유하는 시간의 부재’ 앞에서 혈연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무력해지면서 곤과 아버지의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지는 이야기였다면, <침입자>의 부모는 그 부재의 시간을 혈연을 구실로 애써 지워버린다. 서진 어머니가 유진이 어떻게 살았든 자신의 딸이라며 악다구니를 쓸 때,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유진이라는 존재 체가 아니라 유진의 실종으로 표상되는 결핍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다짐이다. 즉, 우리는 그 맹목적 믿음으로 우리 안에, 또는 가족 안에 존재하는 결핍감을 가려버린다. 결국, 서진 부모의 맹목성이 사이비 종교의 비합리적인 맹목적 믿음과 동일선상에 놓일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존재의 취약함, 또는 가족이 얼마나 허약한 지반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맹목적 믿음이라는 환상 속으로의 도피.

영화 말미에 서진은 자신이 의뢰했던 유전자 검사 결과가 도착하자 그 우편물을 뜯지도 않은 채 파쇄한다. 김소희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이 행위는 “서류적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불신”이며, “진실이라는 목적지는 오늘날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음을 보여준다”. 서류적 진실도, 가족에 대한 맹목적 믿음도, 그리고 개인의 기억도 더이상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없는 시대. <침입자>는 그 시대의 불안과 근심을 넌지시 내비친다. 온갖 모진 일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가족을 지켰던 서진이지만, 손원평은 그가 가족과 함께 엔딩을 장식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물론 이 장면 전에 가족과 함께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긴 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회사 사무실에 홀로 남겨져 창밖을 바라보는 서진의 뒷모습에는 (유진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는 과거처럼 (가족과)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무너져 폐허의 잔해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 폐허 위에서 그는 어떠한 집을 지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그의 어깨에 무게를 더한다. 그는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서진의 뒷모습에 근심의 불안이 감지되는 이유다. 자궁의 병은 이제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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