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프런트 라인
'사라진 시간'과 상투성이 소실되는 장소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사라진 시간>은 해석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라 비평이 필요한 영화다. 그러나 비평은 드물고, 해석은 난무한다. 영화를 둘러싼 반응은 비평이 처한 난처한 상황을 상기하는 측면이 있다. 해석의 욕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칠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어둠 속의 대화

<사라진 시간>은 상투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대사나 상황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영상문법의 활용 면에서도 종종 상투성이 엿보인다. 다만 영화언어가 사용되어온 맥락 속에서 무언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언어의 앙상한 토대 자체를 인식하게 한다. 영화의 시작은 슬로모션 시퀀스다. 슬로모션은 잘 쓴 경우에도 상투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특히 대중상업영화에서 슬로모션은 어떤 상황이 벌어진 이후 주인공이 겪는 충격을 재연하는 장치로 쓰이곤 하는데, 이것은 슬로모션사용의 가장 저열한 방식일 것이다. 혹은 동작의 미학을 강조하기 위해 슬로모션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라진 시간>의 슬로모션은 이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며 맥락 없이 갑작스레 등장한다. 심지어 숏 자체에 담긴 정보가 거의 없기에 그저 ‘지금 슬로모션 장면이 등장했구나’라고 인식할 정도다. 어디론가 걸어가는 배우 조진웅의 옆얼굴이 보인다. 아직 캐릭터가 소개되기 전이기에 그는 그저 배우 조진웅일 뿐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그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와 함께 움직이던 카메라가 서서히 멈추고 남자가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 후경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평범한 마을 풍경일 뿐 시퀀스가 주는 정보를 특정할 수 없다.

정진영 감독은 거의 아무것도 담지 않은 시퀀스를 마지막에 한번 더 반복한다. 처음과 끝을 조응하는 방식 역시 흔하다. 대개 같은 장면이 반복될 때는 합당한 목적이 있다. 장면을 처음과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박찬욱은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반복효과를 지속해서 활용해온 감독이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클로징 시퀀스에서 판문각 시퀀스가 부분 클로즈업된 스틸 이미지로 다시 등장할 때, <스토커>(2013)에서 미스터리한 오프닝 시퀀스가 클로징 시퀀스에서 생략된 숏과 함께 등장할 때, 관객은 비로소 장면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아가씨>(2016)는 ‘다시 보기’의 방식을 인물의 시점과 극적 구조 속에 반복하며 확장한 결과물이다. 반면 <사라진 시간>에서 같은 시퀀스가 반복되었을 때 그것은 관객에게 단일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감정의 매개로 작동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곳은 어디인지,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두개의 시퀀스를 비교할 때 명확히 드러나는 사실은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두번의 슬로모션

얄궂게도 이 ‘모른다’는 감정이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 같다.‘모른다’는 박형구(조진웅)가 처한 상태이자, 형구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감독 정진영이 의지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사라진 시간>이 보여준 효과는 종종 그 안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만든 뒤, 이를 배반하는 방식의 영화들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오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럴듯한 기만’(송경원)이라는 평을 받은 <곡성>(2016)이나 ‘내면 없는 제스처’(안시환)라는 비판을 받은 <우상>(2018)은 관객이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착각에 내기를 걸었고, 그 착각에 필적할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거나 설명하지 않으면서 그 효과를 영화 바깥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침입자>(2019)는 종국에는 서사적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동시에 말하고자 했다. <사라진 시간>은 명확한 서사적 이유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 맥을 같이하지만, 이들과 달리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킨 뒤 이를 배반하거나 트릭을 써서 관객을 끌어들이려는 욕망을 거의 내비치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은 차라리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지속해서 보여주려 한다.

그렇다면 채우려는 욕망이 없는 영화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하루아침에 경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전락’한 박형구가 ‘선생님’이라는 타인의 부름에 굴복한 채 억지로 교단에 섰을 때를 상기해보자. “지금이 무슨 시간이지?”라는 형구의 물음에 아이들은 “수학이요”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관객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을 감독이 이미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객은 걸상에 앉은 아이들처럼 딱 떨어지는 수학식 풀이 과정과 답을 원하는데, 그것을 제시해줄 선생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는 원래 교사가 아니라 지금 막 그런 역할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수학 말고 체육 하자’며 교사 자리를 회피했던 형구가 두 번째 교단에 섰을 때, 수학 대신 국어를 제안하며 비로소 선생 역할을 받아들인다. 이 장면은 수학시간을 기대하며 버텨온 관객에게 ‘수학 시간이지만 국어를 공부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는 것 같다. ‘체육 하자’는 말에 미련 없이 교실을 떠나는 학생들이나, ‘국어 하자’는 말에 순순히 국어책을 펼치는 아이들처럼 영화는 못미더워도 그 선택을 따라주기를 원한다. ‘수학’ 대신 ‘국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 안에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 더러 교육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형구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이 소리내어 읽는 국어책에는 ‘안녕, 좋아, 사랑해, 행복해’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상투어와 이를 예찬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국어책의 내용은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부부의 초반 대화가 왜 그토록 기이하게 느껴졌는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준다. 내게 영화가 기이하게 여겨진 최초의 순간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 수혁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다가 갑자기 학교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참 좋다’ 라고 말했던 순간이다. ‘무엇이 좋다는 것일까’를 질문하기 이전에 이 말은 너무나 상투적이라 충격을 준다. 충격받을 만큼 상투적인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오늘날 거의 쓰지않게 되었다는 자각과 그것이 더러는 신선하게 들린다는 것이 충격을 준다. 이때 ‘무엇이 좋은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좋다’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대상이다. 앞서 언급한 슬로모션의 목적이 효과가 아닌 토대 자체였듯이 말이다. 내가 궁금하거나 해명하고 싶은 건 사건의 진실이나 해석이 아니었다. 영화가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고 그것이 내게 어떻게 보일지만이 궁금했다.

잠시 영화관에서 보게 된 한 광고 영상을 언급하고 싶다. <사라진 시간> 상영 직전 영화관에서 보게 된 광고가 공교롭게도 영화 내용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광고는 특정한 아이의 모습을 한 AI를 둘로 구분한 뒤, 한쪽에겐 무방비로 영상을 노출하고 다른 쪽에는 이를 적절히 통제한 뒤 엄마 역할을 맡은 사람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비교하는 영상이었다. 예상 가능한 대로 영상에 무방비로 노출된 AI는 엄마를 향해 부정적인 단어를 쏟아냈고, 통제된 아이는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다. 영화와 관련지어 이 광고의 흥미로운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광고에서 AI의 겉모습을 일치시켜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관객에게 실험의 객관성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대조적인 결과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트릭이다. 이를 형구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그가 잠들었을 때와 깨어났을 때 모두 같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가 마주하는 인물들에게 구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영 안에 다른 인물이 있더라도 결국 이영인 것처럼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보이는 것에 좌우된다. 반대로 이영의 몸에 머물던 영혼의 관점에서 존재가 연속성을 갖는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형구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광고에서 주목된 다른 요소는, 두명의 AI 중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쪽은 부정적인 단어를 말하는 AI라는 점이다. 통제된 AI는 소위 ‘국어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 말은 수혁과 이영 부부가 보여준 모습을 수식하는 적당한 말이기도 하다. 이들은 흡사 국어 교과서만으로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 AI처럼 보인다. 감독은 이들의 대화에 대해 ‘70년대 멜로영화’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들의말과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맥락을 두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금붕의 <연지구>(1987)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50년 전에 죽은 여화(매염방)는 연인 진방(장국영)을 찾아 젊은 시절의 모습 그대로 세월을 건너 현재의 홍콩에 온다. 그녀에게 홍콩은 이미 낯선 곳으로 변한 뒤다. 여화의 예스러운 말투와 폐기된 단어 사용은 그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웃음거리이지만 결국 그녀의 사랑은 오늘의 인물을 감화시킨다. <연지구>가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의 변화된 풍경에 대한 애상을 드러냈다면, <사라진 시간>은 이야기의 축을 수혁과 이영 부부에게서 형구에게로 급격하게 전환하면서 연속적으로 인식되던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요청한다. 이제 극단적 단절을 기입하기 위해 50년의 시간차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 멀쩡하던 건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다음날 그 자리에 똑같은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오늘날 재개발의 속도 속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형구는 오늘날 정체성을 확증할 수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장소의 성질을 존재의 성질로 변환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존재를 잃고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 자연스러운 일들이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묻는다.

서사와 장치의 전환적 관계

영화가 내부에서 서사를 작동하는 방식은 형식과 내용, 내용과 내용의 관련성을 시간의 간격을 두고 조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영화가 보여준 상투적인 표현들이 다른 형태로 반복될 때, 그것은 더는 상투적이기를 그치고 영화의 선택이자 의지가 된다. 수혁과 진규(노강민)가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교실에서 대화하는 첫 시퀀스에서 후시녹음을 연상시키는 하울링이 감지된다. 특히 진규의 말에서 이러한 느낌이 강했는데, 이것은 관람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에 나의 착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설사 감각의 오류라 해도 이것이 다른 시간대의 개입이라는 설정을 예견하고 수용하게 만들었기에 이를 밀고나가보고 싶었다. 오늘날 좀처럼 발견되기 힘든 하울링과 이로 인한 목소리와 입술의 움직임 사이에 존재하는(혹은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된) 미세한 어긋남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현재의 대화가 아니라 시차적인 대화라고 인식하게 한다. 비슷한 대화가 진규와 형구 사이에 다시 한번 반복되므로 이것이 터무니없는 가정만은 아닐 것이다.

수혁과 이영이 집에 함께 있을 때, 대화 장면에 주로 쓰이는 오버 더 숄더 숏 사이로 오즈 야스지로적인 정면 얼굴 숏이 삽입된다. 흔한 대화 장면에서 예기치 않은 숏이 끼어드는 순간, 인물들 사이에 묘한 분리를 예감하게 된다. 이후 수혁의 얼굴에서 수혁의 죽은 어머니에 빙의된 이영의 목소리가 보이스오버로 들려올 때, 이러한 예감과 의심은 확신이 된다. 이영의 증상을 정확히 설명하기 이전에 이를 예고하는 듯한 숏이 있다. 수혁이 친구들을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을 때 갑자기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곧이어 이영이 숏 안으로 들어온다. 이영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카메라는 마치 ‘빙의’하듯 이영의 기운에 의해 진동하며 그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 같다. 이영이 겪는 ‘빙의’라는 증상은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는 초자연적 현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증상이 “뜨개질 귀신이 씌었나”라는 초희(이선빈)의 상투어를 통해 반복될 때 증상과 표현은 묘한 충돌점을 그리며 기존의 맥락을 흔든다. 사고 현장을 방문하고 수사하는 과정에서 형구는 종종 혼잣말을 한다. 혼잣말하는 인물이 이상하게 보일 리 없다. 그런데 형구의 아내 지현(신동미)이 “당신 왜 그렇게 혼잣말을 해? 꼭 나는 없는 사람 같다니까”라고 짚을 때, 그 발언은 영화와 관객 사이에 맺어진 오랜 협약을 건드린다. 배우의 혼잣말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데, 그 이유는 지금 그의 대화를 관객이 보고 듣기 때문이다. 통화 장면의 재현에 실제보다 과도한 정보가 담기는 것은 이와 관련한 익숙한 클리셰다. 연예인의 일상을 보여주는 TV 예능프로그램에서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모른 척한 채 혼잣말하는 이들을 목격하는 것도 흔하다. 형구의 혼잣말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지만, 이를 지적하는 영화 내부의 대사에 의해 영화적 허용의 맥락과 영화 내부의 초자연적 현상간의 경계는 지속해서 교란된다. 그 순간 영화 내부에 안착한 인물처럼 보이던 형구의 위치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어딘가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슬로모션 시퀀스에서 다루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 오프닝의 흑백 화면이 클로징에서 컬러로 바뀐 것에 관해서다. 흑백 화면이 컬러로 전환될 때 그것은 과거와 현재처럼 시간의 결절점을 표시하는 장치로 기능하곤 한다. 영화를 통과한 뒤 다시 흑백의 오프닝을 떠올렸을 때, 문득 형구가 처음 목격한 다 타버린 집이 떠올랐다. 타버린 집은 형구가 겪는 변화와 함께 멀쩡하게 복구되었고 이는 클로징이 컬러인 이유와 연결된다. 비유하자면 흑백 화면은 모든 것이 불타 검게 그을린 광경이며, 컬러 화면은 불탄 집이 멀쩡하게 복구된 광경과도 같다. <사라진 시간>이 흑백과 컬러 사용에 있어 새로운 용법이나 다른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흑백과 컬러의 변화가 그 자체로 더는 감각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대에 그 변화를 마치 불탄 집이 복구된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사라진 시간>의 형식은 내용을 보강하는 동시에 형식 그 자체에 관해 발언하며, 내용과 장치의 관계를 새롭게 조정한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참 좋다’라는 보이스오버에 관한 언급을 고의로 유보했다. 관람 직후 그 말이 형구의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생각할수록 그 대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참 좋다’는 영화 초반 수혁이 한 말의 반복이므로 수혁의 것으로 들린다. 목소리의 위치가 영화의 바깥에 걸쳐 있다는 점에서는 감독의 목소리를 대리한다고 느껴졌다. 혹은 이것이 영화의 주인공이 이제 막 영화로부터 빠져나왔음을 표시하는 장면이며, 어쩌면 영화에서 형구가 시각적인 존재가 아닌, 음향적인 존재였음을 확증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누구의 목소리인가보다 주목되는 건 말이 삽입된 위치다. 목소리는 아무것도 없이 화면이 텅 빌 때까지 기다린 뒤에 ‘참 좋다’라는 말을 새긴다. ‘참 좋다’라는 말이 없었다면 아무도 이 어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크레딧 직전의 암전일 뿐이다. 영화는 대사의 위치를 통해 의미 없는 검은 화면 역시 영화에 포함된 것임을 표시한다. 영화는 그렇게 암전으로밖에 품을 수 없었던 어둠을 자신의 것으로 품는다. 텅 빈 화면과 그 화면이 비어 있음을 증명하는 목소리는 결국 영화가 닿으려 한 지점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상태의 의미에 관해 여기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각자가 생각하는 어둠이 있을 것이고, 암전된 극장 공간도 그중 하나다. 그 어둠은 그저 덧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망망대해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은 그러한 상태가 가능할까. 그리고 그것에 대해 ‘참 좋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