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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아메드'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소년 아메드>는 충격적인 장면을 예비해놓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그것을 비난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이 글은 비난을 예비한 일종의 변론서다. 이때 변호 대상은 감독의 선택이기보다는 나의 시각이다. 그 순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 번 머릿속으로 장면을 재생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부분은 왜곡되었을지 모른다. 그 왜곡된 부분이 이 변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길 기대하며 썼다.

핸드헬드, 핸드홀드

다르덴 형제의 핸드헬드는 리얼리티의 매개로 흔히 이야기된다. 이에 관해 누구나 말하지만, 핸드헬드 촬영법이 어째서 리얼함을 탄생시키는가에 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 가능한 한도 내에서 거칠게 말하면 몇몇 핸드헬드 영화가 리얼함 대신 ‘다르덴 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데 그치는 것을 보면 핸드헬드가 곧 리얼리티를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간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자기도취다. 흔들리는 카메라는때때로 본 것, 찍은 것, 창조한 것에 대한 도취 외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르덴의 핸드헬드에서 도취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다만 다르덴의 핸드헬드는 누군가의 손이 그것을 움켜쥐고 있음을 표시하며, 그만큼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찍히는 대상과 유사한 항렬을 이룬다. 그러니 문제는 단순히 리얼리티만은 아니다.

다르덴 영화의 핸드헬드라는 낡은 주제를 다시 꺼낸 이유는 <소년 아메드>의 마지막, 어쩌면 냉정하기까지 한 추락 장면 때문이다. 스크린 속에서 빠른 속도로 관객을 향해 다가오는 전차의 움직임은 더는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스크린 안에서 일어나는 몸의 추락은 오늘날에도 종종 관객을 놀라게한다. 특수효과가 전혀 없는 예측 불가능한 실제의 추락일 때 더욱더 그렇다. 일단 추락이라는 현상에 주목하자면 우리는 다르덴의 영화에서 추락의 충격을 이미 체험한 바 있다. <자전거 탄 소년>(2011)에서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간 시릴(토마 도레)은 한 소년이 던진 돌에 손을 맞아 추락한다. 이 순간은 아무런 예고나 편집의 흔적 없이 그대로 상연된다. 추락은 실재하는 위협(돌멩이)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소년이 돌을 던진 이유는 명확하다. 범행의 대상이 된 남자에 뒤이어 등장한 그의 아들은 절도 계획에서 예상치 못한 잉여였다. 사건이 법적으로 해결된 이후 해소되지 않은 잔여가 소년과의 우발적인 만남으로 드러났을 때, 관객은 어쩌면 시릴이 저지른 잘못에 맞는 속죄와 화해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시릴이 추락하는 순간,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죄와 벌의 깔끔한 교환에의 기대는 추락한다.

소년의 추락이 남기는 잔상

죄와 벌을 둘러싼 복잡하게 얽힌 이같은 관계망을 딜레마라고 요약할 때, 이는 다르덴이 이제껏 보여준 세계와 연속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더 차일드>(2005)의 브뤼노는 여자친구 소냐와의 관계에서 생긴 아이의 입양을 브로커를 통해 추진했다가 돌이켜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브뤼노는 돈을 돌려주고 아기를 돌려받지만, 번복으로 생긴 손해를 이유로 금품을 갈취당하는 곤경에 처한다. <로나의 침묵>(2008)에서 로나는 벨기에 국적 취득을 위해 위장 결혼한 뒤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며 돈을 모아 연인과 가게를 차릴 꿈을 꾸지만, 계약 남편 클로디와의 예상치 못한 관계가 깔끔하던 계획에 균열을 낸다. 반면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추락은 관객을 목격자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충격에 의한 내상과 연루가 혼재된 보다 질긴 수렁이다. <약속>(1996)에서 이민자의 추락이 상황을 통해 암시된 바 있으나, 실제 추락하는 모습은 생략되었다. 소년이 추락하는 모습의 재현은 다르덴의 영화세계에서 간단치 않은 변화다.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의 추락은 시릴의 추락과 같은 충격효과를 불러오지만, 추락의 세부 내용과 그것이 주는 감정의 경로는 다르다. 아메드는 외부 자극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과 믿음으로 인해 추락한다.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선택과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주리라는 사소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아메드는 선생 이네스의 돌봄 학교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지붕을 타고 올라 건물 외벽에 매달려 이동하던 중 그가 손으로 잡았던 창문틀이 그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추락한다. 추락 직전 아메드는 자신을 관리하던 사회복지사를 피해 도망나왔고, 곧장 이네스의 학교로 달려왔으며, 무기가 될 만한 날카로운 것을 손에 쥔 참이다. 일련의 행위는 아메드가 이네스를 공격하겠다는 처음의 결심이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아메드의 행위를 이해할 만한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종교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아메드를 비난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급작스러운 추락은 행위에의 판단을 정지시킨다. 나아가 아메드의 추락은 시릴의 추락과 기시감을 형성하면서 그를 다르덴적인 인물로 일시에 편입시킨다. 아메드를 다르덴의 인물로 수용하는 행위는 영화에 내포된 것인 동시에 관객인 나의 의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화적인 인물로 이해하지 않는 이상 인물을 이해할 방도가 영영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빈곤한 가운데 겨우 다르덴적 인물이라는 선택지를 쥐게 된다.

추락의 전조 현상은 손에 쥐거나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놓치는 것이다. 다르덴의 영화에서 추락이 유독 충격을 주는 이유는 인물이 무언가를 붙드는 행위가 늘 절실했기 때문이다. <로제타>(1999)의 첫 장면은 해고를 통보받은 로제타가 자신을 끌어내려는 사람들에 맞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붙들고 버티며 저항하는 모습이다. 해고에 맞서는 행위는 무엇보다 무언가를 붙드는 것으로 드러난다. 자신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가스통을 붙든 채 우는 마지막 장면은 무언가를 붙드는 행위가 생사를 건 절실한 몸짓임을 알게 한다. 인물이 붙드는 것이 누군가의 몸일 때, 그 행위는 더욱더 애처롭고 강렬해진다.

<더 차일드>에서 소냐의 몸을 붙들며 애원하던 브뤼노와 <로나의 침묵>에서 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며 로나에게 엉겨들던 클로디(두 캐릭터 모두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한다)의 몸짓도 잊을 수 없지만,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의 행동은 유독 마음에 박힌다.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찾아 간 병원에서 자신을 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던 시릴은 대기석에 앉아 있던 생면부지 사만다의 몸을 붙들고 버티기 시작한다. 시릴의 맹렬함으로 인해 사만다는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넘어져 바닥에 끌린다. 시릴의 후견인이 되기로 한 사만다의 선택에 의문을 붙일 수 없는 이유는 시릴이 사만다의 몸을 붙드는 이 순간 때문이다. 이때 사만다가 시릴과 함께하기로 한 선택의 의미는 ‘내가 옆에서 지켜줄게’가 아니라, ‘때로는 너와 함께 넘어질게’라는 각오에 가깝다.

사람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아메드는 서로를 붙잡는 강렬한 접촉을 보여주던 다르덴의 인물군에서 낯선 존재다. 그는 여자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급진적인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오랜 선생인 이네스와의 악수조차 거부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 강아지의 혀와 침 등 물렁물렁하고 축축한 것과의 접촉을 불결하다고 여기며 피한다. 접촉에 대한 거부 반응은 그가 도구로 벌이는 대담한 일들을 생각하면 기이하다. 아메드의 도구는 이네스를 찌르기 위해 준비했던 칼과 손잡이 부분이 갈린 칫솔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것이다. 아메드가 농장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보다 다시 누군가와 접촉하는 방법이다. 농장에서 기르던 개가 자신의 손을 핥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아메드는 조금씩 동물에게 손을 내밀고, 아주 잠깐 루이즈와의 접촉을 받아들인다. 그외에 아메드에게 허락된 접촉은 접견실을 통과하기 직전 몸수색하는 손,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는 손처럼 그와 적대 관계에 놓여 있긴 하나 그것조차 접촉에 대한 교육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에서 보여준 가장 급진적인 접촉은 루이즈가 아메드의 안경을 잠시 빌려 쓰는 순간에 깃든다. 이때 안경은 사물을 잘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루이즈는 아메드에게 안경을 통해서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어느 쪽의 자신이 더 나은지 묻는다. 아메드에게 안경을 벗는 것은 대상에 대한 흐릿한 체험을 의미하지만, 루이즈에게는 안경을 쓰는 것이 그렇다. 누군가의 시선을 빌리는 일이 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간 시선의 차이를 체험하는 일임을 영화는 안경이라는 도구를 매개로 보여준다. <소년 아메드>는 흡사 아메드의 시선을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핸드헬드 팔로 숏으로 인물의 뒤를 쫓는 것으로요약되는 다르덴의 카메라 기법은 종종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체험하기 위함이라 인식되었다. 그러나 관객에게 요구되는 건 아메드의 시선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에 덧입혀지는 흐릿한 필터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같은 도구는 전혀 다른 결과를 출력할 수 있다. 아메드는 자신의 안경 뒤에서 이네스를 찌르기로 결심하지만 아메드의 안경 뒤에서 루이즈는 아메드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르덴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도수가 잘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각자의 흐릿함을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대면하는 일이다. 당신에겐 인물이 선명하게 보이는가, 혹은 흐릿하게 보이는가.

사물을 믿다

다르덴이 제시한 인물 위로 홀로그램처럼 흐릿하게 겹쳐오는 한 사람이 있다. 독방 문 뒤에서 이뤄지던 아메드의 비밀스러운 행위에서 투옥 중이던 한 남자의 분투를 떠올렸다.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1956)에서 투옥된 퐁텐느(프랑수아 르테리에)는 탈출할 방도를 찾기 위해 문 뒤에서 집요한 노동을 한다. 아메드가 칫솔 손잡이의 비상한 활용법을 발견하기 이전에 배식 중 몰래 빼돌린 숟가락 손잡이를 바닥에 갈아 문을 헐겁게 만드는 데 사용한 선지자 퐁텐느가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의 비밀 노동의 목적은 정반대다. 아메드의 노동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고, 퐁텐느의 노동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준비 행위다. 반면 아메드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한 이유는 그의 논리에 따르면 자신의 구원 때문이기도 하며, 퐁텐느가 자신을 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홀로 보초를 서던 관리인)를 죽여야 했음을 떠올려보면 마냥 대조적인 것만으로 볼 수 없는 지점도 있다. 물론 퐁텐느는 그에 대한 대가처럼 같은 방을 쓰게 된 한 청년을 구한다.

아메드가 추락 직전 손으로 창틀을 쥔 순간, 고정된 것처럼 보였던 사물은 예측하지 못한 변신을 시도한다. 아메드의 추락은 한편으로는 형벌이지만, 달리 보면 그의 행위를 정지시키기 위한 어떤 계시처럼 보인다. 신적 계시이기보다는 나의 망상이 불러온 상상의 계시에 가깝다. 퐁텐느와 아메드는 분리되는 나무판자를 사이에 두고 시공을 뛰어넘어 대화한다. 견고해 보이던 나무 문이 의외로 헐겁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 퐁텐느가 문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분리하던 순간이 아메드가 잡으려던 창문틀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으로 교환된다. <인터스텔라>(2014)에서 책장을 사이에 둔 채 중력을 이용한 쿠퍼와 머피의 시공을 뛰어넘은 교감처럼, 퐁텐느는 아메드의 맞은편에서 나무판자를 툭 하고 건드리는 것으로 응답한다.

바닥에 추락해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된 아메드는 뒤로 누운 자세에서 왼손으로 몸을 옆으로 밀어 조금씩 겨우 이동한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다만 그 고통스러운 움직임을 체험하듯 바라보게 된다. 얼마 후 이동을 멈춘 그는 틀림없이 이네스를 공격하기 위해 벽에서 뽑아냈던 못을 품에서 꺼내 창가에 있던 쇠로 된 구조물을 두드려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추락한 소년을 깨우던 벨소리라는 기적의 신호가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스스로 구조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화분을 지탱하는 데 쓰였던 못이 잠재적 무기를 거쳐 마침내 자신을 구하기 위한 도구가 된다.

도구의 쓰임이 변화되는 순간은 다르덴의 영화에 기적의 숨결을 불어넣고는 했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 중 다르덴의 단편 <어둠>은 인간 신체의 도구적 전환의 순간이 담긴다. 영화관에 몰래 숨어들어 누군가의 가방을 뒤지던 소년의 손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여자의 손에 닿아 그대로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된다. 그 순간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마치 소년을 깨우는 것처럼 울리던 휴대폰 벨소리는 너무도 현실적이기에 마치 천국에서 들려오는 성스러운 멜로디처럼 느껴졌다. <소년 아메드>에서 도구가 기적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먼 방황의 시간을 거친다. 입안을 세척하는 도구인 칫솔은 누군가를 찌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로 변화했다가 양말 속의 은밀한 비밀로 묻히고, 단단한 고정못은 무기로의 가능성을 멈추고 마침내는 누군가를 부르며 삶을 간구하는 애처로운 신호가 된다. 이것이 소년의 변화를 확신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사람도, 도구도 아니다. 오직 그 도구가 예측 불가능한 쓰임으로 전환되는 순간이 있으리란 것뿐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누군가와 만나는 과정은 늘 통증을 동반한다. 다르덴의 인물들은 늘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분투해왔으나 이처럼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악수를 하는 가장 단순한 일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된다. 마침내 이네스의 손을 붙든 아메드는 사과하며 용서를 빈다. 그러나 영화는 화해의 무드 속에서 극을 멈추진 않는다. 이네스가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이 홀로 남아 신음하는 아메드의 얼굴에서 끝이 난다. 이러한 마지막은 다르덴의 영화에서 인물이 퇴장하는 방식을 떠올려볼 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뒷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영화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다르덴 영화의 인물들의 일반적인 퇴장 방식이다. <약속>에서 이고르와 아시타의 걸어가는 뒷모습, <자전거 탄 소년>에서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시릴의 뒷모습, <내일을 위한 시간>(2014)에서 남편과의 통화를 끝내고 미소를 띤 채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 <언노운 걸>(2016)에서 환자를 부축하고 진료실로 걸어내려가는 제니의 뒷모습은 이들의 삶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혹은 마지막 순간 인물이 내뿜는 강렬한 감정의 표현을 보여준다. <더 차일드>에서 소냐를 마주한 브뤼노의 눈물과 움켜쥔 손, <로제타>에서 리케 옆에서 가스통을 붙들고 우는 로제타, <아들>(2002)에서 고백의 진통 이후 묵묵히 선별한 목재를 감싸는 올리비에와 프랜시스 등 외로운 인물들의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다. 다소 예외적인 결론을 보여주는 <로나의 침묵>은 죽은 클로디의 아이를 가졌다고 믿는 로나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낯설고 어두운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때 다르덴은 이례적으로 외화면 음악을 삽입하며 존재를 향한 로나의 믿음에 응답한다. 반면 아메드는 더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무력한 모습으로 관객의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진다. 물론 가까이에 이네스가 있고 사과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은 위안을 주지만, 그렇다고 혼자 남은 인물의 고립감과 외로움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삶이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을지, 그렇다면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다. 그의 얼굴은 뒤이은 음악과 뒤엉켜 잔상을 남기지만 그것에 맞는 적당한 말을 찾기 힘들다. 적어도 나는 아직 그 얼굴을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영화는 아메드가 추락 후 자신이 쥔 도구로 소리를 내는 순간에서 멈춘다. <사형수 탈옥하다>의 부제는 ‘바람은 소망하는 곳으로 분다’이다. <소년 아메드>를 통해 다시 마주한 그 어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인간의 소망이 자신을 배반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연히도 사물이 우리를 구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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