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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가 불러일으킨 반성적 향수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내게 중국영화는 지아장커에 멈춰 있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동안 보지않던 중국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먼 훗날 우리>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우리가 잃어버릴 청춘> 등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영화가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잃고 있음을 깨달았다. 멜로드라마적 각성.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기

<먼 훗날 우리>

2018년 중국에서 개봉한 <먼 훗날 우리>를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관람하면서 20여년 전 <8월의 크리스마스> <박하사탕> <파이란> 등 한국 멜로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먼 훗날 우리>는 지금 한국영화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정서와 문제의식이 지금의 중국에는 현재의 것으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눈물짓는 멜로드라마의 인물들은 어느덧 한국영화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그 시절의 한국영화의 정서가 사라졌음을, 또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는 것 자체가 멜로드라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의 현재를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사라진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되돌릴 수 없다 해도,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의 행위일 수 있다. 복고적 향수가 아닌 반성적 향수의 시작.

멜로드라마의 시간성

<먼 훗날 우리>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여년의 시간을 흐르며 젠칭(장백연)과 샤오샤오(주동우)의 만남과 이별, 재회를 그린다. 주동우는 그 특유의 활기로 화면을 가득 채울 때조차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을 함께 느끼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래서 젠칭과 샤오샤오가 행복해하는 순간에도 불안의 기운이 흐르고, 그것이 운명론적 지배를 받는 멜로드라마적인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물론 <먼 훗날 우리>의 운명론적인 비극성은 그 서사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춘절을 맞으러 고향으로 향하던 길에서 만나 수년간 사랑을 나누다 헤어진 젠칭과 샤오샤오는 2017년 설날에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재회한다. 기차가 비행기로 바뀌고, 행선지는 고향에서 베이징으로 바뀐다.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보여주는 과거의 이야기와 몇년 만에 우연히 만난 현재의 하루를 번갈아 보여주며 서사를 전개한다. 이미 결정된 현재와 그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번갈아 보여주는 서사 구조는 두 사람의 관계를 엇갈리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그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멜로드라마적 순간은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그토록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음을 인식할 때 출현하곤 한다. 영화 말미에서 보여주는 안락한 분위기의 젠칭은 그가 베이징에서 꿈꾸던 삶에 당도했음을 보여주지만, 정작 그에게는 젊은 시절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현재의 젠칭이 샤오샤오를 통해 깨달은 것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 그것이 과거에 놓친 기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온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too late)는 인식의 순간과 함께 멜로드라마의 관객은 눈물 흘린다. 되돌리고 싶은 우리의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의 무심함’은 멜로드라마적인 눈물의 핵심이다. 시간의 무심함과 그로 인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체험할 때, 우리는 멜로드라마적인 슬픔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영화에서 이러한 멜로드라마적인 시간성은 장르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를 비평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장르적 속성을 재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엇갈림이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압력과 맞물린 것이라면 이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가질 수 있다.

추방의 공간과 낭만의 공간

<먼 훗날 우리>에서 젠칭과 샤오샤오 사이에 놓인 또 다른 인물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베이징’이다. 베이징은 두 사람에게 이별의 운명을 부여한다. ‘너무 늦음’이라는 인식의 타이밍과 함께 ‘그것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If only)라는 상상적 가정은 관객의 눈물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베이징은 그들이 함께할 수 없도록 하는 적대적 힘으로 작동한다. <먼 훗날 우리>는 베이징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투어리즘 영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관광지로서의 베이징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춘절 아침, 모두가 고향을 향해 떠난 텅 빈 베이징 시내와 자금성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젠칭의 방은 베이징이 정착의 공간이 아니라 ‘추방’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짐을 싸들고 샤오샤오가 젠칭의 방에 찾아오고, 집주인에게 방을 비워준 두 사람이 또다시 방을 옮기고, 그 후 다시 샤오샤오가 젠칭을 떠나고, 이렇게 이들은 정착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떠돈다.

샤오샤오와 같은 추방당한 자를 가리켜 ‘사라진 매개자’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매개자들이란 역사의 변화 과정에서 하나의 가능성이자 행위자로 존재했지만, 그 변화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체제의 사회로 닫혔을 때는 정작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또는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된 것은 변화의 결과이지 그 통과의 과정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샤오샤오가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는 그 엔딩에서 샤오샤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음을 넌지시 보여주는데, 이때 고향은 베이징이 상실한 것을 간직한 낭만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추방의 공간과 낭만의 공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까 고향처럼 낭만화된 공간은 추방의 경험을 감추려는, 또는 위로하려는 상상의 결과다. <먼 훗날 우리>는 중국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감추고, 지우고, 극복하려 했던 바로 그것들을 이제 되돌아보고 떠안으려 한다.

<먼 훗날 우리>의 엔딩에서 젠칭과 샤오샤오는 서로의 행복을 빈다. 젠칭은 자신의 꿈을 이루었지만 허전함을 품고 살아갈 것이고, 샤오샤오는 자신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온기로 가득한 고향의 품에서 살아갈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영화는 결국 베이징에서 추방당하지만 그럼에도 샤오샤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추방당한 자들이 자신을 추방한 베이징 또는 중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영화, 달리 말해 추방당한 자와 정착한 자 사이의 화합의 이미지를 전시하려는 쪽에 더 가까운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매개자인 샤오샤오가 행복할 때 젠칭은 부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화합의 이미지는 완성된다. <먼 훗날 우리>가 구원의 판타지라면, 그 구원의 궁극적 대상은 샤오샤오가 아닌 젠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며 흘린 눈물이 아깝지 않은 것은 사라진 매개자의 존재와, 그 사랑과 정서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진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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