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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김소희 평론가의 <해협>

오민욱의 <해협>, 횡단하는 감각

제8회를 맞은 무주산골영화제는 지난해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처음으로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올해 영화평론가상은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수상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보년, 김소희, 손시내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해 오민욱 감독의 <해협>과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에 대한 비평을 작성했다. <씨네21>은 젊은 평론가들이 한국 독립영화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치길 바라며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평문을 공개한다.

오민욱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관통하는 주된 형식은 이미지의 중첩이다. <1987061020080610>(2008)은 87년 6.10 항쟁을 담은 스틸 이미지와 2008년 한미 FTA 반대 촛불시위 영상을 한 화면 위에 디졸브한다. 이때 이미지의 중첩은 떨어진 시간을 잇는 행위였다. 부산시민공원 조성 행사와 재개발의 현장, 황령산 기슭의 바위 이미지를 교차하는 <>(2013)는 고정숏으로 촬영된 바위 디졸브와 공원 잔디 위에 존재의 움직임을 투명하게 박제하는 방식으로 중첩을 새긴다. 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을 암시적으로 드러낸 <적막의 경관>(2015)은 동시간대의 드라이빙 숏을 중첩하되, 현재의 스틸숏에서 과거 스틸 이미지로의 점진적인 이동을 표시하며 두 방식을 절충한다. 감독은 과거와 현재의 장소를 직접 겹치는 초기 방식에서 벗어나 현재의 시간 속에 지속해서 과거를 틈입하는 방식으로 보다 추상화되고 내면화된 중첩의 방식을 실험해왔다.

<해협>에도 이미지의 중첩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령 제의를 알리는 악기 소리를 바탕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보여주는 화면 뒤로 마을과 바다 이미지가 차례로 드러난다. 이때의 이미지는 시간의 연결성을 그리던 전작과는 달리 떨어진 장소를 연결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와 음향의 관계에 관한 탐색이다. 이미지 사이에서 이뤄지던 중첩은 이제 이미지와 사운드, 특히 서술적 맥락을 포함한 말과의 중첩으로 변화하고 확장한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 안에서 이미지와 사운드 실험은 이미 존재해왔다. 예컨대 <적막의 경관>에서 박물관 소개 영상 속 배우의 안내 멘트와 <>에서 부산 시민공원 그리기 대회 축사 등이 사운드의 재료로 활용된 바 있다.

이때 말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한 채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중단되며, 이 때문에 관객은 말의 내용에 거리를 두도록 유도되었다. <해협>의 내레이션 속 음성은 중단 없이 흐른다. 목소리는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 사이에 의지할 곳이 되어 준다. 전작에서 사운드가 작품 바깥에서 작품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해협>에서의 내레이션은 영화와 함께 기획되고 조율되었다는 것도 차이다.

서간체 내레이션

내레이션은 타이난에 사는 샤오라는 여성이 태국 부리람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띤다. 서간체 내레이션은 영화에서 강조되는 장소성, 이동성과 만나, 떨어진 공간을 잇는다는 편지의 본래 속성을 강조한다. 이때 편지의 궤적은 송신지에서 발신지로 단일한 이동이 아니라, 내레이션 속에서 언급되는 여러 장소를 포함한 분산적 여정을 그린다. 편지에서 샤오는 영화제 참석차 부산에서 타이난으로 온 남자(감독)를 만나고, 그의 제안에 따라 진먼섬으로 이동한다. 실제의 이동과 기억의 여정이 교차되는 한편, 동행자인 ‘그’(감독)의 이야기에 의한 청취와 상상의 여정까지 포함된다. 이미지와 내레이션은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며 폐쇄적 관계에서 벗어난다.

샤오가 진먼섬에 도착했다고 말할 때, 화면은 앞선 편지가 흐를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태우는 마을의 제의만을 지속해서 보여준다. 목소리는 진먼섬에서의 다섯 번째 밤을 이야기하지만, 화면으로 보이는 것은 낮의 풍경이다. 때로는 내레이션의 서술이 풍경과 묘하게 들어맞는다. ‘저승의 문이 열리면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말할 때, 한쪽만 열린 창문 이미지는 저승 문의 비유가 된다. 산자오 마을터를 보여주며 그 마을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장면처럼 이미지와 내용이 완벽히 조응할 때도 있다. 이미지와 내레이션은 각각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싱크가 완벽히 맞아 들어가거나 어긋나면서 장소의 감각을 어지럽힌다.

샤오의 편지는 답신을 기다리지 않거나, 답신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어머니에게로 연거푸 보내진다. 대신 답신처럼 도착한 것은 사진 이미지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태국 부리람에서 촬영된 몇 장의 스틸이미지는 감독이 샤오에게 어머니와 함께 부리람을 관광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보라고 주문한 결과물이다. 답신의 실제 수신자는 샤오가 아닌 감독 오민욱인 셈이다. 송신자의 자리에는 샤오와 감독이 나란히 존재하며, 수신자의 자리에 샤오와 어머니가 함께 자리한다. 오민욱의 영화에서 감독의 이야기가 이처럼 두드러진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감독이 부산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것은 그의 삶의 기반이 부산이라는 것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적막의 경관>의 배경이 된 거창은 부친의 고향으로 벌초를 위해 오가던 경험이 바탕이 된 작품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 영화 내부에 감독의 서사가 기입되진 않았다는 점에서, 제삼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감독의 이야기가 영화 내부에 언급되는 <해협>의 방식에 주목된다.

감독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방식은 최병우 기자의 존재를 기입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최병우 기자는 진먼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1958년, 823포격전을 취재하기 위해 해협을 건너던 중 실종된다. 감독은 최병우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그에 관해 증언해줄 사람을 찾는 대신 최병우와 자신을 대위법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샤오의 내레이션이다. 샤오는 ‘그(감독)와 비슷하면서도 어긋난 사람’이라고 최병우를 소개하는 한편, ‘전쟁을 기록하기 위해 바다를 건넌 두 남자’라는 공통의 내러티브를 부여한다. 이에 더해 어떤 장소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샤오에게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이라는 공통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고 전한다. 감독은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대상과의 접점을 설득하는 방식 대신에 제삼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을 ‘대상’의 자리에 놓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는 동시에 감독의 자리를 투명하게 지운다. 그 자리에는 부재하는 인물과 미지의 인물이 들어온다.

그런데 화자로서의 샤오에 관해서는 할 말이 남았다. 샤오는 1인칭의 편지 낭독자만이 아니라 편지의 대독자다. 영화 중간에 최병우가 일본 유학 시절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샤오의 음성으로 들리는데, 다른 편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께’로 시작하기 때문에 샤오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반복된 편지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어딘가 낯선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할 때쯤 ‘1942년 4월 7일 일본 고치에서 아들 최병우 올림’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최병우 씨가 자신의 어머니께 쓴 편지를 대독한 데 이어 샤오는 자신이 읽은 편지에 관한 설명을 이어간다. 이제 편지는 이전과 같이 ‘어머니께’로 시작하고 끝맺는 방식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상태로 간헐적으로 이어진다. 이제 내레이션의 성격은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인지, 일기인지 아니면 제삼자를 염두에 둔 것인지 불분명해진다.

서간체 내레이션이 영상 위에 덧입혀질 때, 그것은 영상과 함께 쓰이는 현재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샤오의 내레이션은 때때로 앞선 내레이션의 시간을 언급하거나 조정하며 변화하는 시간을 표시한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샤오는 지난 새벽 화롄에서 발생한 지진을 언급한다. 화롄의 지진은 2년 전 타이난에서 발생한 지진과 샤오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겪은 난터우 지진에 관한 (간접) 기억을 불러온다. 지진에 관한 이야기는 해가 지날 때마다 다시 회고의 대상으로 반복된다. 편지는 기억과 장소, 시간이 분기하는 장소가 된다. 몇몇 내레이션은 어머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기보다는 감독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특히 진먼을 떠나기 전날 편지에서 평온했던 풍경을 회상하며 ‘섬의 평화로운 모습은 그저 치열했던 과거의 전투를 더 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야기에 불과한 걸까요?’라는 질문은 감독을 향한 것 같다.

내레이션 이후 감독은 마치 이에 응답하는 것처럼 과거에 붙들린 부산의 풍경을 보여준다. 내레이션에 따르면 최병우 씨가 일본 유학 시절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그림엽서에 적힌 것이다. 그 엽서에 어떤 그림이 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편지는 어쩌면 자신에게 맞는 이미지로서의 그림을 영화 속에서 찾고 있는 것만 같다. 관객 역시 파편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편지에 어울리는 그림을 찾아야 한다. 내레이션과 어긋난 이미지의 배치는 더욱 능동적인 관람을 요청한다. 이 편지가 수신인과 송신인이 뒤섞인 것이라고 할 때,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그 자체로 답장이라고 읽는 것도 과도하긴 해도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다.

포착과 스침

이미지를 목소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때, 보이는 것과 내러티브 사이 시차가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관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지나 사운드를 마주친 뒤, 뒤늦게 그 의미를 파악한다. 타이틀 이후 처음 자막으로 명시되는 장소는 ‘진먼섬’이다.

내레이션에서 진먼섬에 당도했음을 언급한 이후이므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장소는 실제의 장소와 분리된 채 부유하는 것처럼 들린다. 진먼섬은 이미지에 앞서 하나의 익숙한 사운드로 제시된다. 처음에 그것은 다른 소리와 섞여 분간하기 힘들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가 점점 명확해진다. 중원절(음력 칠월 칠석) 밤, 타이완 진먼섬은 죽은 자를 위한 제사인 푸두를 위한 악기 소리로 떠들썩하다. 그런데 낯선 소리 사이로 ‘소녀의 기도’ 멜로디가 깔린다. 처음에는 그 음악이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부에서 포착된 것인지, 삽입한 배경음악인지도 분간되지 않는다. 그것이 거리의 청소 차량에서 나오고 있음은 잠시 후 드러난다. 악기 소리와 겹쳐 들리던 음악 소리는 이내 홀로 남아 거리를 울린다. 죽은 이들을 위한 제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누군가의 일상은 진행되고 있음을 그 노래는 알려준다.

이후 진먼의 지하시설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서,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걷는 소리와 함께 ‘소녀의 기도’가 사운드 몽타주 중 하나로 삽입된다. 이후에도 진먼섬을 보여주는 장면마다 어김없이 ‘소녀의 기도’ 멜로디가 흐른다. ‘소녀의 기도’가 간헐적이고도 끈질기게 드러나는 방식은 진먼섬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 샤먼을 보여주는 화면에서 등장한 바그너의 웅장한 오페라 음악과는 명확히 대조된다.

이후 샤오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녀의 기도’와 작곡가 바다르체프스카에 관한 내용이 명시된다. 바다르체프스카에 대한 기록은 폴란드 공습으로 유실되어 그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이다. 한국에서도 ‘소녀의 기도’는 알림음으로 흔히 사용되며, 진먼섬에서도 그러하다는 사실에서 유추하건대 그것이 국제적인 현상일 수 있다. 도처에 존재하나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기록은 유실된 상태라는 아이러니가 ‘소녀의 기도’를 영화의 주제와 부합하는 선율로 만든다.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음악은 일상의 사운드이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죽음과 이와 관계된 의식의 메타포다.

<해협>은 마치 인서트 컷으로만 구성된 영화 같다. 인서트 컷은 진행 중인 메인 플롯을 보강하는 숏으로 정감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해협>이 인서트 컷으로 이뤄진 것 같은 이유는 이미지 속에 정서가 담겨서가 아니라 이미지 간의 위계 설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중요하다고 안내된 특정 숏을 기억하는 대신 거의 모든 숏을 기억하도록 강제된다. 반면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이미지를 스쳐 지나가는 것도 유효한 보기의 방식이다. <해협>은 포착하는 것과 스치는 것 사이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과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사유하게 한다. 여기에 또 다른 층위를 덧붙인다면 어떤 장소에 도달한다는 것을 포함할 수 있겠다. 진먼섬과 샤먼 사이,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를 떠도는 영화의 여정은 그 자체로 장소 사이를 횡단해 어떤 장소에 도달하는 오늘의 감각을 사유하게 한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이미지 위에서 행하는 실험의 기운은 다소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표면 위에는 실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배 위에서 고정숏으로 찍힌 이미지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하면, 거꾸로 나는 비행기를 보여주는 숏도 있다. 후타오이섬과 오키노섬을 차례로 보여주는 장면은 그것이 자료화면의 일부인지, 감독이 포착한 이미지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감독은 이들 섬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이미지가 간헐적으로 중단되고 지속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지금 우리가 눈을 통한 여정을 진행 중임을 일깨우면서 오늘날 횡단이 얼마간 그런 방식으로 바뀌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지도에 의존한 발의 횡단 대신, 거리뷰를 통한 손과 눈의 횡단을 오늘날의 이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거리뷰 화면 위에서 공간을 이동하는 화살표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시간과 이미지가 반응하는 시간 사이 필연적으로 시차가 발생하는 것처럼, <해협>에서 섬으로 다가가는 화면 역시 바다 위에서 미세한 균열과 점핑을 새긴다.

바다를 횡단하는 것은 실제 거리뷰 기능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거리뷰의 커서를 바다 위에 얹어 놓으면 ‘거리뷰를 확인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지속해서 뜬다. 버퍼링 중인 바다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눈을 통한 장소 이동의 감각을 연상시키되, 실제로는 불가능한 횡단이다. 그러므로 이 여정은 현재의 여정이자, 과거를 기억하는 여정인 동시에 미래의 누군가의 여정을 상상하게 한다. 이 여정의 주체가 바다를 건너는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비인칭적 시선처럼 보인다는 것도 이러한 가설을 부추긴다.

육체 없는 감각

방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몸의 기능은 퇴화하고 시각이 발달한 미래의 육체를 상상하게 된다. 육체 없는 시각의 존재인 관객은 누구보다 영혼에 감정이입 하기에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화에는 이야기와 장소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혼이 등장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두 기생의 전설은 이기대라는 이름의 해안가 바위에 새겨진다. 산자오 마을의 전설은 전염병으로 총살된 마을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기이한 기운 속에 떠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이름이 최병우 기자라면 그 옆에 놓일만한 이름은 김종주 씨다. 김종주 씨는 태평양전쟁 말기 부관훼리 곤론마루호 침몰 사건 피해자다. 미군은 김종주 씨가 타고 있던 배에 일본군이 타고 있다고 오인해 이를 격침한다. 김종주 씨의 이야기는 딸 김영자 씨의 인터뷰 음성을 통해 들려온다. 그에 따르면 사고가 일어난 장소 인근 오키노 섬에 건져 올린 시신은 이미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봐도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김영자 씨의 모친은 바다에 빠져 죽으려다 등에 업힌 어린 딸 때문에 죽지 못했다.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24세였고, 김영자 씨는 4살이었다. 김영자 씨의 목소리는 내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외화면에서 삽입되며 부산항 발 부관훼리 선실에서 잠든 김영자 씨의 반쯤 드러난 얼굴과 움직이는 배 위에서 바라본 풍경 위에 덧입혀진다.

김영자 씨의 사연을 비롯한 실제의 진술들은 오민욱 감독이 보여준 실험 이미지를 뒤흔들 만큼 강렬하다. 어떤 실험도 실제의 목소리는 이길 수 없다. 이 비평 글이 멈추어야 할 자리 역시 실제의 언저리다. 물론 김영자 씨의 이야기는 오민욱 감독이 보여준 실험의 맥락에서 이야기되기에 충분하다. 김영자 씨의 인터뷰는 샤오의 서간체 내레이션과 마주 보는 목소리이며 샤오의 음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답장이다. 인터뷰 차원은 내레이션의 차원과 교차하며, 그 자체로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가 삽입되어온 방식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영화적 의미망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김영자 씨가 가진 힘은 단지 김종주 씨의 죽음에 기댄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딸에게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 어머니와 그의 기억을 물려받은 지속하는 삶에서 나온다.

영화적인 존재라 할 혼령은 유혹적이지만, 우리는 현존하는 인물을 외면한 채 혼령에게 홀릴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실존 인물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배회하는 수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게 된다. 김영자 씨의 몸속에서 배회하는 이야기의 흐름처럼 이미지 위에서 미끄러지고, 꿰맞춰 지는 목소리는 그렇게 한없이 이동하는 것으로서만 도달할 수 있는 숙명을 지닌다.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영화는 여전히 목소리에 맞는 이미지를 고르는 중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이미지는 어쩌면 새해 인사에나 어울릴법한 풍경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것이 일출인지, 일몰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다. 그것의 의미가 희망인지 절망인지도 감독의 의도를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니터나 스크린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나, 우리는 눈앞에 놓인 이미지와 그것의 방향마저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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