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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복수극과 서부극이 공존하는 '나이팅게일'이 택한 최소한의 윤리적 행동

의도적 불만족

<나이팅게일>

제니퍼 켄트 감독의 <나이팅게일>에는 두개의 장르가 공존한다. 하나는 강간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극이다. 강간복수극 이야기를 먼저 하자. 이름에 속한 두 단어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장르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배우자 또는 연인이 강간당한다. 주인공은 강간범들을 한명씩 최대한 잔인하게 죽인다. 20세기 중후반 여성 주도 액션물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장르를 피할 수가 없다. 주연이 팸 그리어건 라켈 웰치건 가지 메이코건 여자주인공이 남자들을 살육하는 액션을 시작하는 동기로 거의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강간이 등장했다. 이 리스트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가이드를 따라 챙겨보다보면 한 없이 길어질 수 있고, 그 리스트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바로 <킬 빌> 시리즈다. 현란한 액션과 재미에도 불구하고 <킬 빌> 시리즈가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1960, 70년대 선정영화의 정서에 지나치게 충실해 발전 없이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강간복수극은 양날의 칼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분노하고, 주인공이 피해자 여성인 경우 여성 주도 액션물로 이어지지만, 초반의 강간 장면은 후반의 살육 장면만큼 선정적으로 소비된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이 장르의 대표작들은 성공 여부를 떠나 이 딜레마를 이해하고 이를 의식적으로 변형시키거나 깨트리는 시도를 품고 있다. 그 결과물은 더 불편할 수도 있고 더 대놓고 폭력의 쾌락을 전시할 수도 있고 그냥 이상할 수도 있고, 셋 모두일 수도 있다. <엘르> <리벤지> 그리고 악명 높은 <돌이킬 수 없는>이 이에 해당된다.

<나이팅게일>은 강간복수극의 공식에 충실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인공 클레어 캐롤(아이슬링 프란초시)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에 사는 죄수 출신 아일랜드 여자다. 같은 아일랜드 출신 남자와 결혼해서 아기도 낳았지만, 사악한 호킨스 중위(샘 클라플린)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클레어는 호킨스에게 두 차례 강간당한다. 두 번째 강간 때에는 이를 막으려던 남편과 울어대던 아기가 죽는다. 호킨스는 승진을 위해 로스턴으로 떠나고,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직접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 클레어는 호킨스 일행의 뒤를 쫓는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클레어가 호킨스 일행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이들이 강간복수극의 장르 게임에 동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는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강도 높은 폭력으로 도입부의 고통을 만회해야 한다. 그것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약속이다. 하지만 두 번째 장르인 서부극이 끼어들면서 영화는 다른 길로 간다. 서부극이면서 강간복수극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버트 케네디 감독, 라켈 웰치 주연의 <서부의 여걸 한니>(1971)와 같은 영화가 이 두 장르의 교집합에 속한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서부극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정의상 <나이팅게일>은 서부극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한 오스트레일리아 영화다. 무대가 되는 태즈메이니아섬은 대륙 동쪽에 있으니 서부극이 아닌 동부극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시시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동부극’이라는 명칭은 실제로 존재한다. 소련에서 만든 서부극스러운 영화들을 가리키는 오스턴(Ostern)이라는 표현이 있다. 20세기 영화사를 보면 서부극 또는 유사 서부극은 모든 대륙에서 만들어졌다(소련만 해도 히트한 외국영화 상당수가 미국과 서독에서 만들어진 서부극이다. 안 그럴 거 같지만 그렇다). 어차피 서부극의 배경은 실제 시공간보다 신화적인 세계에 가까우니 이를 다른 나라에 이식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부극’은 미국의 원조 서부극과 특히 유사하다. 유럽에서 건너와 ‘신대륙’을 정복한 백인들이 있다. 이에 맞서는 원주민들이 있다. 별다른 변형 없이 ‘카우보이와 인디언’의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21세기에 이 설정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정통 서부극’의 길을 따를 수 없다. 이들이 모델로 삼는 건 60년대 이후 수정주의 서부극일 수밖에 없다.

<나이팅게일>

위에 적은 도입부 이후의 줄거리 전개를 보자. 클레어는 호킨스를 뒤쫓기 위해 원주민 남자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를 길잡이로 고용한다. 미국 원주민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으로 바꾼 익숙한 전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지리적 공간은 태즈메이니아다. 다른 건 다 잊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가 있다.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백인과의 전쟁 중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살아남은 원주민은 300명 정도에 불과했고 1878년에 마지막 원주민이 죽었다.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요약이지만 보다 사실에 충실한 복잡한 이야기가, 태즈메이니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결말을 바꾸는 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남자를 백인 여주인공이 고용하는 순간부터 <나이팅게일>은 그냥 백인들만의 이야기에 머물 수가 없다. 클레어에 쏠려 있던 영화의 무게중심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조금씩 빌리에게 옮겨간다. 끔찍한 성차별과 성폭력의 이야기였던 것이 끔찍한 인종차별과 제노사이드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고 그 중간에 성폭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강간범은 끝까지 강간범으로 남고 폭력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클레어와 빌리가 겪는 폭력은 하나의 연속체 안에 있다. 그 연속체의 일부인 태즈메이니아의 사법 체제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도 안된다. 포기나 복수만이 답이다.

이 상황에서 장르의 약속은 어떻게 해야 할까? 빌리가 클레어의 자리를 물려받거나 둘이 힘을 합쳐 나머지 복수를 완수해야 할까? 그래도 관객은 수긍할 것이다. 지켜야 할 약속은 호킨스가 무참하게 죽으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카타르시스가 바꿀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역사를 가상의 길을 통해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이야기 전체가 카타르시스를 위한 도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에도 관객을 분노하지 않게 할 최소한의 권선징악과 복수는 있다. 그것도 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 모두가 처절한 피의 복수를 기대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모든 장르 규칙을 피해간다. 형식적인 복수는 있지만 이것이 관객의 카타르시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니퍼 켄트는 의도적으로 관객을 불만족스럽게 한다. 그것은 실제 역사를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 행동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바라보며 인위적인 카타르시스로 스스로를 만족시켜서는 안된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여전히 장르물이다. 백인 침략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죽어간 원주민에 대한 백인 이야기꾼의 죄의식, 고정된 장르 판타지 안에 갇힌 실제 역사를 끄집어내려는 시도 모두 미국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장르에서 왔고, 켄트의 고민은 장르적 고민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벗어나는 길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몰살당한 역사의 끝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어느 길을 취해도 너무 늦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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