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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녀의 조각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에 관하여

롱테이크 숏이 인상적인 영화 두편이 올해와 지난해 초 우리 곁을 찾았다. 한편은 위기에 빠진 극장의 구원투수가 될 임무를 안고 달렸고, 다른 한편은 OTT 플랫폼의 품에 무난히 안겼다. 지켜지고, 지속되길 바라는 외침이 가득한 롱테이크 속에서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버틴다.

눈에 비친 희박한 공기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각들’이라 명시된 제목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의 조각들>은 롱테이크를 주된 형식으로 가져가기보다는 특정 장면에 두드러지게 사용한다. ‘왜 롱테이크로 보여주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롱테이크 시퀀스는 마사(바네사 커비)의 출산이다. 출산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담긴다. 가정 출산을 결심한 마사가 느끼는 산통, 예정된 조산사 바바라와의 어그러진 약속, 그를 대신한 다른 조산사 에바(몰리 파커)의 등장, 병원에서의 분만을 권하는 남편 숀(샤이아 러버프), 침실에서 진행된 분만과 딸의 출생, 그리고 잠시 뒤 닥쳐온 예기치 않은 불행까지 한 호흡으로 가져간다.

롱테이크로 펼쳐지는 출산 장면은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단지 출산 장면이 드물게 묘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산 장면을 느린 호흡으로 보여준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2018)에서도 주인공 클레오의 출산 장면을 실시간의 감각으로 묘사한 바 있었다. 물론 이 장면은 클레오의 임신과 불안 등 그녀가 누구인지를 충분히 묘사한 뒤에 등장한다. 반면 <그녀의 조각들>에서는 상황에 관한 사전 준비 없이, 부딪히듯 그 장면을 마주해야 한다. 관객은 이들이 누구이고, 출산 방식을 결정하는 데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등의 전후 사정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시퀀스를 감내해야 한다. 특정 인물의 출산이기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포괄하는 대표로서 누군가의 출산을 마주하는 것처럼 관객은 장면의 묘사 그 자체, 혹은 출산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의 앙상블을 지켜보게 된다.

롱테이크는 종종 ‘리얼한 체험’의 맥락에서 이야기된다. 영화의 리얼리티는 시대와 매체의 흐름에 따라 갱신되어왔으므로 이것이 리얼한 체험인가를 묻기 전에 오늘날 대부분이 합의하는 리얼함에 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심은진은 롱테이크가 다른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리얼리티를 구축해왔다고 분석하며 회화, 연극, 텔레비전, 게임 등 네 갈래를 제시한다.(‘영화의 롱테이크와 상호매체성’ ) 이러한 분석을 참고해 덧붙이자면 롱테이크는 크게 고정숏이냐 이동숏이냐, 그리고 배경이 실제 공간이냐 가상이냐에 따라 혹은 그 혼합이냐에 따라 분류된다.

앞서 인용한 네 가지 분류 중 최근작의 롱테이크는 주로 게임의 매체성과 접속하며 가상적인 것을 리얼한 것으로 인식하는 흐름 속에 있다. 반면 <그녀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체험은 실제적 리얼리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텔레비전, 혹은 연극적인 방식에 가깝다. 무엇보다 롱테이크가 주인공과 동일시한 체험을 위해 마련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출산 장면을 롱테이크로 목도한다고 하여 출산의 간접 체험이 가능할 리 없다. 이때 체험은 시퀀스가 보여주는 내용과 상황에 대한 체험이 아닌, 카메라의 시선을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체험과 저항

카메라 시선과의 동일시는 영화가 보여주는 내용으로부터의 거리감을 전제한다. <그녀의 조각들>은 영화화되기 전, 동명의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서 상연된 바 있다. 연극 역시 영화와 마찬가지로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이 연출하고 각본가이자 감독의 파트너인 카타 웨버가 극을 지었다. 롱테이크 숏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어쩌면 영화가 연극의 특성을 느슨하게 공유한 흔적일 수 있다. 고정된 롱테이크 숏은 초기 영화의 주된 방식이자, 영화가 연극과 종종 비교되는 이유다. 무대극의 형식을 영화 용어로 설명할 때, 각 장은 롱테이크 고정숏에 해당한다. 물론 연극과 영화에서 특정 장면을 동일한 길이로 보여주더라도 관객이 체감하는 길이는 분명 다르다. 연극의 지속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지는 이유는 연극 무대의 미장센이 관객의 시선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 점한 위치에 따라 볼 수 있는 것이 조금씩 달라지며 어느 정도는 분산된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이 극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별다른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와 그가 전하는 대사는 지금 여기의 관객과 소통하는 실시간성을 지니며 시각적 차이를 상쇄한다. 반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과 동일시는 절대적인 조건이며, 실시간성을 지닐 수도 없다. 연극과 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무대가 움직일 수 없는 장소나 장치의 한계를 드러내는 조건이다. 연극에서는 대부분 무대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무대를 이동하는 극이 있긴 하다) 배우들이 움직인다면,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이동성이 곧 무대를 움직이게 하는 요소다. 연극에서는 한정된 공간 위에서 배우들의 등 퇴장이 사건을 만들어낸다면,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이동하며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상황을 비춘다.

다시 <그녀의 조각들>로 돌아오면 작품의 롱테이크는 연극적인 방식의 영화적 번역으로서의 롱테이크를 보여준다. 영화는 클로즈업을 연상시킬 정도로 실제 인물, 혹은 인물의 상황과 가깝게 밀착해 있다. 중심인물은 마사와 숀 부부와 뱃속의 아기, 그리고 바바라를 대신해 등장한 에바다.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비추는 곳이 곧 무대로, 인물들은 숏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며 등퇴장해 사건을 만든다. 이와 함께 이들이 점한 공간인 집을 통해 스펙터클을 만든다. 거실, 욕실, 침실 순으로 중심 공간이 이동하며 각 장소에서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몸과 심리의 반응을 묘사한다.

<그녀의 조각들>이 집을 보여주는 방식은 샘 멘데스가 <1917>(2019)에서 장소를 탐험하던 방식에 비하면 소박하게 느껴진다. <1917>은 전체 영화를 하나의 숏처럼 보여주려는 의지를 밀어붙인 영화다. 이를 위해 장소의 변화와 이동을 전제로 한 무대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녀의 조각들>은 벽과 문으로 이뤄진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스펙터클이 가능한 공간인 듯 군다. 편집되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은 오직 배우들의 연기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만 기댄다.

스펙터클이 기대되지 않는 자리에서 전환적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드루초 영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감독은 전작 <주피터스 문>(2017)에서도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했다. 총에 맞은 뒤 공중에 몸을 띄우는 기이한 능력을 갖게 된 시리아 난민 아리안(솜버 예거)은 그의 능력을 발굴한 의사 스턴(메랍 니니트제)의 관리 감독 아래 집과 병원 등 좁은 실내에서 몸을 공중에 떠올리는 기술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그들에게 돈을 받는다. 감독은 아리안의 몸이 떠오르는 시퀀스를 나누지 않고 보여주면서 그 장면을 관객 역시 믿도록 권한다. 남자의 움직임은 때로는 그가 회전하는 대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회전시키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아리안이 회전함에 따라 공간 전체가 함께 회전하는 시퀀스는 마치 우주를 중심으로 한 SF영화에서 한정적으로 쓰여온 스펙터클을 그와 동떨어진 시공간 위에 펼치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 속에 던져진 인간을 보여주는 대신, 한 인간으로 인해 가능해진 우주의 차원을 보여주며 소수에게만 허락되어온 우주를 지구에로 가까이 끌어내린다. 누군가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형상은 영혼이 몸을 떠나는 모양의 영화적 표현이기도 하기에, 그의 능력은 곧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민에게 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발 딛고 설 수 없는 불안정한 토대라는 점에서 난민의 땅에 대한 은유로 우주를 발견한 측면도 있다.

감독은 장르적 한계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기법이 기존에 사용되어온 방식을 전유한다.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는 그것이 롱테이크로 보여주어야 했던 이유를 숨기면서 과연 롱테이크로 보여줄 만한 장면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고민을 불러온다. 이 롱테이크에 관해 개인의 내밀한 사정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의 윤리성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런데 그러한 지적이 자신의 장면에서 느껴야 할 쾌감을 부정당한 데 대한 반감과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기억의 장대한 씨앗

물론 작품에서 구사한 형식이 기존 용법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영화 전체를 옹호할 수는 없다. <그녀의 조각들>의 롱테이크는 기존 용법을 비트는 동시에 실은 그 안에서 뚜렷한 목적을 지닌다. 그 목적은 시퀀스를 체험하는 동안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시차적으로, 불현듯 인식된다. 롱테이크의 목적은 마치 반전처럼 드러난다. 이때 반전은 서사의 흐름 안에서 숨겨온 비밀을 누설하는 데서 오는 반전이 아니라, 영화의 기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반전이다.

마사의 법정 진술 시퀀스는 반전을 가능하게 한 주된 요소다. 조산사의 책임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법정 다툼에서 마사는 주요 증인으로 참석한다. 출산의 순간에 초점이 맞춰진 변호사의 질문과 마사의 대답이 오갈 때 관객은 롱테이크 시퀀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본 것과 마사의 답변을 대조하게 된다. 조산사측 변호인은 심문 중 마사에게 조산사가 업무를 소홀히 했는지, 가정 분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마사 본인이 선택한 것은 아닌지를 따진 뒤, 아기가 태어난 직후의 상황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그는 아기의 눈이 무슨 색깔이었고, 머리 색깔은 어땠는지, 아기를 안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등을 묻는다. 그 질문은 딸을 잃은 ‘피해자’의 상처를 후벼파는 과도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사와 관객의 기억을 촉발하는 매개다. 이를 통해 아기의 존재가 시퀀스 내부에서 소외되었음을 자각하게 한다.

아기의 눈 색깔, 아기를 안았을 때의 온도와 냄새 같은 것은 롱테이크 시퀀스 속에 제대로 담기지 않았던 것들이다. 출산 직후 에바는 아기를 마사의 품에 안겨준다. 남편 숀이 아기를 품에 안은 마사를 촬영하려 할 때, 카메라는 부부에게서 시선을 돌려 에바에게로 향한다. 에바는 이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거울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쉰다. 거울 속에서 번쩍하고 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그 직후 거울을 통해 아기의 호흡 정지를 알아차린 에바는 아기에게로 긴급하게 다가간다. 시퀀스 어디에도 아기를 온전히 감각하는 일은 새겨져 있지 않다. 그저 짙은 머리카락의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잠깐의 인상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롱테이크 숏을 소환하는 법정 장면은 롱테이크에서 상실된 것이 무엇이었나를 보여준다. 심문 장면에서 카메라는 대답 직전 마사의 목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마사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순간, 관객 역시 기억 속 롱테이크 시퀀스를 더듬는다. 관객이 인물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행위를 할 때, 영화적 체험은 비로소 시작된다. 체험은 롱테이크가 진행되는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끝난 뒤 다시 접속하는 순간 속에 존재한다.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매 순간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출산의 순간 혹은 출산 이후 태아의 움직임을 담는 데는 인색하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속하는 마사의 통증처럼 카메라는 지속하고, 클로즈업에 가깝게 인물들에게 밀착한 카메라는 시각적으로 숨 막히는 경험을 직조한다. 카메라가 인물을 잡는 방식과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이 겪는 상황이 어우러져 집은 숨쉬기 곤란한 밀폐된 공간처럼 보인다. 숀이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갈 때 열린 문틈으로 비로소 시각적인 숨통이 트인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스스로 공기가 되려는 것 같다.

마치 공기와 같은 영화들이 있다.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우리의 시간>(2018) 초반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피사체와 밀착한 채 낮은 곳에서 인물 곁을 맴돈다. 인물의 시선보다 낮은 위치에 놓인 카메라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 때, 카메라는 흡사 공기처럼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녀의 조각들>에서 카메라는 인물과 가까이 밀착해 있으나 인물은 카메라를 보지 않고,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롱테이크가 체험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인물의 입장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공기가 되는 것 같은 체험이자, 육신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경험에 가깝다.

정치적 개인에서 개인의 정치로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은 작품을 통해 정치적인 논점을 건드려왔다. <화이트 갓>(2014)은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살던 릴리(조피아 프소타)가 잠시 아버지 다니엘의 집에 맡겨지면서 반려견 하겐과 헤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겐과의 이별의 원인은 강압적인 부모, 경계하고 고발하는 이웃들, 개의 품종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정책 등 다층적이다. <화이트 갓>은 주거지에서 박탈당한 생명체를 그렸다는 점에서 난민이 처한 상황을 SF로 펼쳐낸 <주피터스 문>과 연결된다. <그녀의 조각들>은 이런 흐름에서 벗어난 작품처럼 여겨진다. 이 작품은 문드루초 감독 부부가 실제 겪은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 전작이 분명한 정치적 발언을 했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내밀하다.

변방으로 밀려난 이를 주목해온 감독은 <그녀의 조각들>에서는 다른 차원의 존재론을 펼친다. 딸의 죽음 뒤 마사의 가족은 죽은 딸, 혹은 손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을 빚는다. 마사는 딸의 시신을 의학 교육을 위해 기증하려 하고, 숀은 이에 반대한다. 숀이 딸의 죽음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기억하고 추모하려 한다면 마사는 어떻게든 그가 태어나야 했던 이유를 세상에 새기고 싶어 한다. 영화는 상실을 통한 고통과 상처의 치유라는 남겨진 자들에 의한 익숙한 상실의 서사를 펼치는 대신 상실된 것의 관점에서 그를 위한 구체적인 행위 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 작품의 정치성은 바로 나의 상처가 지금 부재한 누군가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한 자의 구체적인 실천으로부터 나온다.

문드루초 감독은 나름의 비율로 현실과 판타지를 섞어왔다. <화이트 갓>에서 난폭하게 폭주하던 개의 무리가 소녀의 트럼펫 소리에 잠잠해지는 순간이 있고, <주피터스 문>에서는 인간의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기적을 보여준다. <그녀의 조각들>에서 기적은 더 깊고 소박해졌다. 마사는 사과 씨앗에 물을 적셔 냉장고에 보관한다. 얼마 뒤 발아한 씨앗을 본다. 지금 막 발아한 씨앗은 클로징 시퀀스에 무성한 열매를 맺은 사과나무로 점프한다. 마사가 사과에 집착했던 이유는 ‘태어난 직후의 딸에게서 사과 냄새가 났다’는 법정 진술을 통해 확인된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에 주목했던 감독은 이제 사과나무를 통해 인간과 식물의 교감을 쓴다. 그와 함께 사과의 씨앗만큼 작은 배아의 상태를 생명체의 근원으로 기억하려 한다. 동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비존재로 교감의 범위를 넓히면서 영화는 점점 낮고도 미약한 곳을 파고든다. 미세해서 보이지 않는 상태로까지 자신을 투명하게 소멸시키는 것, 그것이 카메라를 통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스펙터클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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