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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월드의 종합판 '펜트하우스'

욕망의 집

<펜트하우스>

김순옥 월드는 기본적으로 ‘집’을 빼앗는 자와 되찾으려는 자의 싸움이다.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이 지닌 욕망의 궁극으로 그려진다. 이 세계의 입문작인 <아내의 유혹>(SBS)과 최근작인 <펜트하우스>(SBS)가 모두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한 상류층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김순옥 월드를 향한 뜨거운 반응의 핵심에는, 갈 데까지 간 막장의 재미보다 부동산공화국 한국의 욕망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순옥 월드의 3단 진화

김순옥 월드의 역사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MBC), <황후의 품격>(SBS)이 각 시기의 출발점이다. <아내의 유혹>으로 시작된 김순옥 월드 1기가 복수 위주의 이야기라면, <왔다! 장보리> 이후는 기존 복수에 성공의 욕망이 더해지고, <황후의 품격>부터는 그 욕망의 서사가 블록버스터급으로 진화한다. 이같은 변화는 드라마 속 집의 변천사로도 살펴볼 수 있다. 최근작으로 올수록 집은 더 많은 욕망을 끌어안으며 더 넓고 화려해진다.

가령 <아내의 유혹>은 서민 집안 출신의 구은재(장서희)가 건설회사 회장 아들인 정교빈(변우민)과 결혼으로 상류층 집안에 입성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은재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 하던 숙적 신애리(김서형)는 교빈을 유혹해서 은재를 쫓아낸 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무능력한 아버지 아래서 고생한 은재와 그마저도 없는 고아였던 애리에게 집이란 ‘부유한 정상가족’ 세계로의 안착을 의미했다.

김순옥 월드 2기에서 이 ‘집’은 부와 성공을 향한, 더 강렬해진 욕망의 집결지가 된다. 예컨대 <왔다! 장보리>는 부와 위신의 상징인 한국 최고 한복집 비술채의 수장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그린다. <내딸, 금사월>도 마찬가지다. 건축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는 천부적 재능과 재벌 상속인의 운명을 타고난 금사월(백진희)과 그의 자리를 뺏으려는 오혜상(박세영)의 지난한 대결 이야기다. 두 사람은 과거의 비밀 궁궐 천비궁 재건 프로젝트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 천비궁은 경쟁의 승자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줄 욕망의 대상과도 같다.

점점 거대해진 욕망의 ‘집’은 마침내 3기에 이르러 아예 황실이 된다. 입헌군주제를 소재로 한 <황후의 품격>은 더없이 화려한 황궁을 배경으로 한다. 황실은 부와 명예, 절대권력까지 포함한 거대한 욕망의 용광로다. 뮤지컬 배우에서 황후가 된 주인공 오써니(장나라)가 궁의 어두운 음모를 파헤치면서 결국 황실 폐지까지 이끌어낸다는 내용과 모순되게도, 드라마는 욕망의 스펙터클로서 황실을 묘사하는 데 여념이 없다.

<펜트하우스>

욕망의 정점으로서 집에 대한 묘사는 <펜트하우스>에서 한층 노골적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는 100층짜리 주상복합아파트 헤라팰리스는 그 작명에서 알 수 있듯, 현대판 황실처럼 그려진다. 실제로 가장 높고 화려한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는 심수련(이지아)은 ‘퀸’으로 불린다. ‘퀸’은 막대한 부, 사회적 위신, 명예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 드라마는 ‘퀸’ 심수련의 자리와 펜트하우스를 차지하려는 프리마돈나 천서진(김소연), 마찬가지로 그 자리를 욕망하는 부동산 컨설턴트 출신 오윤희(유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기에 부동산 투기로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심수련의 남편 주단태(엄기준)와 ‘헤라클럽’ 구성원의 이야기가 더해진다.

<펜트하우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집의 폐쇄성이다. 거주민 대부분은 최소한의 윤리적 갈등이나 고민조차 보이지 않는, 오로지 상승과 포식의 노골적인 욕망만 남은 인물들이다. 최고의 보안 시설과 오락편의 시설까지 갖춘 헤라팰리스는 이들에게 최적화된 세계다. 전망 엘리베이터와 ‘최고의 뷰’를 감상하기 위한 통창 등의 모티브에서 드러나듯 헤라팰리스 바깥세상은 그들에겐 철저히 단절된, 그저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펜트하우스>의 세계는 코로나19 위기를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불황’이라고 표현한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펜트하우스’, 김순옥 월드 욕망의 정점

김순옥 월드 속 ‘집’이 최근으로 올수록 넓고 화려해지는 것은 형식적 특성에도 적용된다. 많은 막장 드라마가 전형적인 가정 멜로극의 틀 안에 머무는 것과 달리 김순옥 작가는 홈드라마의 기반 위에서도 꾸준히 다채로운 장르적 요소를 뒤섞는 전략을 썼다. 김순옥 월드 특유의 속도감은 그러한 서사 기법에서 나온다.

<펜트하우스>

가령 <아내의 유혹>은 기존 여성 복수극에 뷰티숍을 둘러싼 경쟁과 같은 기업 드라마적 갈등 구도를 결합해 막장극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왔다! 장보리> 역시 극 초반을 경쾌한 분위기의 명랑 홈드라마 스타일로 전개하면서, 비술채의 서바이벌 경연 구도, 보리(오연서)와 재화(김지훈)의 로맨틱 코미디 등 다양한 성격의 이야기를 뒤섞어 폭넓은 연령층의 사랑을 받았다. <내딸, 금사월>또한 ‘드라마판 <건축학개론>’을 표방하면서 트렌디 멜로의 감각을 가미했다. 할 말이 많아진 이야기는 더 넒은 집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황후의 품격> 이후 김순옥 월드는 이같은 기존 서사 전략에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더해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로 진화한다. <황후의 품격>부터 협업한 주동민 PD는 김순옥 특유의 혼종적 장르를 다양한 볼거리로 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황후의 품격>에서 무협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 황제 이혁(신성록)과 나왕식(최진혁)의 검술 대련 신이나 황실경호대의 카 체이싱 액션 신 등이 대표적이다. <펜트하우스>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이어진다. 첫회 오프닝에서 심수련이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드레스를 갈아입는 장면은 한편의 CF처럼 연출되었고, 심수련과 로건 리(박은석)가 복수를 위해 헤라클럽 구성원을 납치해 응징하는 에피소드는 스릴러 그 자체였다.

주동민 PD의 스펙터클한 연출은 무지막지한 속도감과 박진감으로 밀어붙이는 김순옥 작가의 스타일과 만나 서사의 구멍을 메우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기존의 김순옥 월드에서 평균 10분당 하나씩 사건이 벌어졌다면 여기에 다채로운 볼거리까지 더해진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김순옥 월드의 치명적인 단점 또한 더욱 두드러진다는 데 있다. 속도전에 휘말린 시청자들은 작품의 허술한 개연성과 비윤리성에 대해 비판할 여유조차 사라진다. <펜트하우스> 속 인물들이 유독 얄팍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풍경과 속도에 현혹된 채로 그들과 함께 질주하는 사이, 김순옥 월드는 또다시 기록적인 시청률에 대한 호평만 남기며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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