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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가 달성해낸 특별한 평범함을 고심하다
송경원 2022-04-27

끝내 버텨내 오늘에 다다른 마음들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쓴소리를 하자면 너무 많은 영화들이 관성에 기대 습관처럼 대충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퀄리티와 창작자의 의도를 보장하기 위해, 자본은 중요하다. (궁핍하고 소소한) 현실을 이야기로 옮기기 위해선 실은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걸 <파친코>를 보며 새삼 절감한다.

평범한 건 귀하고 드물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다. 가공된 이야기 속에는 흔치 않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비범한 인물들이 시련을 뚫고 나간다. 일상의 심심한 시간들은 대체로 뇌리에 머물지 못하고 씻겨 내려가기에 마치 비어 있었던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평범함들이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땐 귀하고 비싸진다. <파친코>의 1, 2, 3, 7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의 전작 <콜럼버스>(2017)의 오프닝에는 모더니즘 건축의 후원자였던 어윈 밀러의 저택이 나온다. 어윈 밀러는 말한다. “평범함은 값비싸다.” 이건 일상의 소중함, 평범함의 귀중함을 역설하는 말인 동시에 문자 그대로 사실을 적시한 명제다. 일상이 일상의 자리에 있을 때는 알 수 없다. 그걸 ‘이야기’의 형태로 굳히고, 영상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보기 위해서는 비싸고 비범한 노력이 필요하다. 뿌리 내린 공간을, 나고 자란 땅을 떠난다는 건 그런 거다. Apple TV+의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를 보며 문득 귀하고 비싼 순간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감탄이 일었다. 한동안 스크린에서 마주하지 못했던 에너지와 야심을 <파친코>에서 발견한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부터 1989년 일본 오사카까지 4대에 걸친 재일 교포 가족의 일대기를 다룬다.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 적응하는 과정에 대한 고백은 사실 이야기 세계에서는 흔한 소재다. 이야기는 범상치 않은 체험과 비극을 탐닉하기 마련이고, 디아스포라의 흔들리는 시간들은 이들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갔던 사람들의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자극한다. 영화는 지워진 역사와 기억을 복원시키는 데 탁월한 힘이 있다. 그런 이유로 지워진 자들의 외면받은 역사(혹은 기억)는 인식의 확장 차원에서 언제나 영화(정확히는 영상스토리텔링 콘텐츠라고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영화라고 통칭하겠다)가 사랑받아온 소재다. 짧은 식견에 기대 함부로 판단하자면 사실 디아스포라의 기억에 관한 영화는 적지 않다. 재현된 영화 차원에서 말하자면 오히려 흔하고 평범한 쪽에 가깝다. 게다가 <파친코>의 이야기 줄기도 그다지 독창적이진 않다. 여러 세대에 걸친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연이라든지,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 개인사 바깥에 초연하게 운동하고 있는 역사의 물결을 ‘보이는’ 게 아니라 ‘감지되도록’ 하는 건 (최근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그러했듯) 많은 영화들이 걸어온 정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평범해서 고귀한 것들의 이야기

<파친코>는 이 모든 평범하고 안전하고 익숙한 요소들을 살뜰히 끌어모아 기적 같은 순간들을 창조한다. 영화의 물리적 경계가 진즉에 허물어진 상황에서, 여전히 영화의 흔적이나 마법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건 스크린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머물 것이다. 스크린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어떻게 씨앗을 뿌리느냐, 다시 말해 무엇을 보여주느냐보다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핵심이란 말이다. 물론 <파친코>는 그 자체로 비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모든 이야기가 주인공, 인물 각자에게는 나름의 방식으로 비범하다. 정말 어려운 것은 여기에 다시금 평범함을 부여해 일상의 얼굴을 덧씌우는 것이다. 이민진 작가는 역사에 기반한 사실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초고는 분노해 있는 소설”이었다며 그걸 사람들이 읽고 싶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좋은 이야기는 호소하지 않는다. 작가의 분노를 ‘듣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재미있게 읽고 함께 분노‘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평범함의 근간이다. 내용은 소설에서 상당히 각색되었지만 드라마 <파친코>도 이와 같은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연대기순으로 흘러간 원작과 달리 드라마 <파친코>는 시간 순서를 재배열한다. 이것은 과거의 재현이나 기록이 아닌 적극적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행위다.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시간에 시작점과 끝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태어난다. 시작과 끝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화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때론 말하는 방식(telling)보다 화자(teller)의 위치가 이야기의 욕망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파친코>는 8화의 내용을 두명의 연출자가 맡았다. 전반부를 맡은 코고나다 감독의 핵심은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전작 <콜롬버스>에서도 그러했듯 장면의 균형과 리듬감을 중시한다. <파친코> 전체를 관통하는 형식을 딱 두 가지만 고르라면 하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아웃포커스, 다른 하나는 교차편집의 플래시백 구조다. 코고나다는 세대를 오가는 교차편집을 통해 이야기에 평범함을 덧씌운다. 1화 오프닝 시퀀스는 1915년 일제강점기 조선과 1989년 미국 뉴욕을 오가며 구성된다. 1915년 선자의 어머니 양진과 아버지 훈이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선자를 얻는다. 아들 세명을 낳았지만 돌도 넘기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들의 가슴엔 한이 맺혀 있다. 아기가 건강하게 출산하길 기원하는 양진에게 무당은 ‘아이는 건강하게 대를 이을 것’이라 말한다. 착해빠진 남편을 위해서라도 건강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양진의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1989년 파트에서 선자의 손자이자 금융가로서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솔로몬 백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병렬의 플래시백과 감정의 포커스 인

하지만 일련의 편집을 1989년 솔로몬 백의 입장에서 할머니가 태어난 일화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 가족의 일대기를 조각내서 조금씩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지점이 많다. 시간순으로 보자면 증조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는 원인과 결과처럼 느껴지겠지만 여기에 인과관계를 연결하기에는 시간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파친코>는 이들 가족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들긴 하지만 서사에 얽매여 있진 않고 느슨하다. <파친코>는 왜 60년의 시간을 교차로 보여주는가. 이것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설명이 아니라 공감의 작업이다. 오프닝의 교차편집은 사실상 동시적인 시간을 다루는 감각에 가깝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버텨내야만 했던 이들의 삶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 양진과 딸 선자, 선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 이들의 삶은 연대기의 횡렬이 아닌 도상적 이미지의 유사성에 근거한 병렬이다. <파친코>의 편집은 이미지(혹은 사연)의 유사성을 연결시켜 리듬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회상, 재일 교포라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포개지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일상의 경이와 아름다움은 사건과 사건 사이 행간에 깃드는 법이다. 양진과 선자, 모자수와 솔로몬의 공간들. 영도와 오사카와 뉴욕, 심지어 1930년대의 도시와 지금의 도시의 기억들. 공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의 무게와 흔적이 수시로 교차시킨 끝에 이야기를 목격하는 우리의 마음을 고요하고 강렬하게 뒤흔든다.

사람 사는 꼴은 어딜 가나 다 비슷하고 동시에 제각각 다르다. 일상의 자리, 공간의 여백을 만들어주는 것이 교차편집이라면 제각각 다른 인물의 상태, 감정을 몰입시키는 건 거의 모든 화면에 걸친 포커스 인이다. <파친코>는 인물에 확실한 포커스를 주고 여백을 날린다. 어디까지나 그 공간을 점유 중인 사람의 감정이나 상태에 집중시킨다는 말이다. 이건 공간이 인물을 바라보도록 만들거나 공간을 또 다른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영화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보다 이야기의 세계에 안내받는 감각이라 해도 좋겠다. 배경을 날리는 일관된 아웃포커스 덕분에 매 화면은 (심지어 어시장의 남루한 모습을 보여줄 때조차)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다가온다. 보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할까. 이민진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는 재미를 갖춘다. 예쁜 화면에만 집중했다면 과거 혹은 추억의 미화라는 아쉬운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파친코>는 과거와 현재가 마주 보고 대화하는 듯한 편집 덕분에 영리하게 재현의 함정을 피해간다.

냄새와 소리, 뿌리를 더듬는 법

계속 이야기가 가진 평범함의 미학을 논했지만 정정해야겠다. 선자는 비범하다. 타고난 상재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세상을 보는 밝은 눈을 갖췄다. 흔히 어머니는 강하다, 고들 하지만 내 생각엔 간혹 강한 어머니들이 있는 거다. 약하고 비겁하고 무책임한 부모가 있는 것처럼. 사물의 일면을 집단의 대표적인 속성으로 기억하는 건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믿음이자 욕망에 가깝다. <파친코>의 어머니, 아니 부모들도 그렇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는 말한다. “네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내가 뭔 짓을 해서라도 세상 더러운 것들이 널 건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이건 결과로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듬뿍 쏟아부은 사랑은, 대가 없는 무한의 애정은, 이 살갑고 애달픈 의지는 세대를 건너 면면히 대물림되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 자리 잡는다. 처한 상황과 현실의 벽, 형편에 따라 각자 다른 형태로 표현되지만 한결같은,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 누군가는 그걸 핏속에 흐르는 한맺힌 피라고 하고, 어떨 땐 정체성 혹은 민족성이라고 쓴다. 이름표 따윈 상관없다. 그건 시대와 형태를 아무리 달리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덩어리다. <파친코>가 내내 부여잡고 관객을 향해 쏟아내는 것, 누군가의 기억과 역사를 뒤적인 끝에 가슴속에 앙금처럼 남는 것도 결국엔 이 뜨거운 덩어리들이다.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형식과 구성, 심지어 이야기조차 이 덩어리들에 비하면 곁가지에 불과하다. <파친코>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5화 기준으로) 딱 두 가지가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하나는 냄새다. 어머니와 함께 담던 김장김치 냄새, 집에서 나는 쿰쿰한 흙냄새, 개울가의 물냄새까지 <파친코>의 정겨운 장면 곳곳에는 온갖 냄새로 가득하다.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일군 땅의 냄새이자 사람들의 냄새이며 고향의 냄새는 민족이라는 신화의 냄새로 우리를 감싼다. 한국 사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무언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의 냄새만큼은 분명히 기억한다. 어머니 양진이 딸을 일본으로 떠나보내며 지어준 밥 냄새.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쌀 품종에서 나는 특유의 쌀 냄새가 아니라 어머니 마음의 살냄새다. 5화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선자가 옷을 빨아버려 냄새가 지워지자 오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머지 하나는 소리다. 4화에서 오사카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여가수는 1등 칸의 일본인들을 위해 오페라를 부른다. 공연장 밑에는 좁아터진 공간에서 몸을 누이기도 힘든 조선인들이 있다. 공연을 하다 여가수가 갑자기 판소리를 부르자 일본인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해한다. 하지만 밑바닥에서 소리를 들은 조선인들이 화답하듯 아니면 뭔가에 홀린 듯 합창하자 그제야 불쾌함을 드러내며 성토한다. 여가수의 판소리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울림과 고동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울려퍼지는 게 노성(怒聲)이라면 가장 묵직하고 끈덕진 소리가 여기에 있다. 내지르지 못하고 속에서 삭이고 삭인 끝에 고요하게 새어나온 심장 고동 같은 소리. 한의 소리. 분노를 발산하는 소설 대신 재밌어서 널리 퍼져나갈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이민진 작가의 바람처럼, <파친코>는 때론 화려하고 우아한 화면과 흥미진진한 사연을 거쳐 걸러지지 않을 덩어리들을 남긴다. 이쯤 되면 다시 정정해야겠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 자체가 귀한 게 아니다(물론 그걸 화면으로 다시 타자화하고 성찰하는 영화적인 기적은 놀랍고 아름답다). 평범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던 삶의 질곡과 그럼에도 끝끝내 버텨내서 오늘로 이어져 내려온 마음들이야말로 진정 귀하고 소중하다. 당신의 오늘이 있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어제, 누군가의 오늘이었던 그 모든 순간들에 감사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드라마 <파친코>의 마침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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