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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이다혜 사진 백종헌 2022-10-18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펴냄

한동안 SNS에서 나폴리탄 괴담이 유행했다. 나폴리탄 괴담은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해설하지 않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만 묘사하는, 기승전결 중 기승 구간이 강조되고 전결은 생략된 형태의 짧은 괴담이다. 한국에서는 나폴리탄 괴담이 매뉴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에 실린 ‘궁녀 규칙 조례’의 항목 역시 그렇다.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이런 식이다. “궁궐 내에 설치된 우물은 어떠한 것이라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사용 중인 우물을 발견했다면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위가 어찌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오싹하다. 그런 이야기와 괴담이 잔뜩 실린 책이 바로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이다.

때는 태종 6년(1406), 아직 고려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조선 초가 배경이다. 경복궁 내명부에서 일하는 궁녀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규칙이 있는데, 실제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모은 금기 조항들이다. 게다가 궁녀들은 밤마다 모여 자신이 겪거나 들은 괴담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괴담은 “터가 안 좋다”는 말이다. 입궁 전 궁궐터에서 산 적이 있는 백희는 오빠의 이상한 병증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서 언급한 ‘궁녀 규칙 조례’의 우물 이야기는 ‘웃지 않는 궁녀’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식이다.

단순히 무섭고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괴담의 어떤 부분은 당대의 정치 풍자처럼 들리기도 하고(태종이 왕이 되는 과정을 포함해, 워낙 선혈이 낭자하던 정치의 시대였으니 뒤숭숭한 분위기에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정말로 괴물이 등장해 예상을 뒤엎기도 한다. 책 속의 소사전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한 ‘괴이도감’과 어쩌면 이야기의 본편처럼도 느껴지는 ‘외전’까지 놓치지 말고 읽으시기를.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괴담판 <데카메론> 같은 특유의 분위기는, 이야기가 끝나고도 엉덩이를 떼기 어렵게 만든다.

211쪽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겁을 먹을수록 무서운 것들이 들러붙어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