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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와 함께 춤을!
2001-03-27

<오페라 이마지나리아>

좋은 애니메이션은 종종 뜻밖의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몇해 전 한 시사잡지가 창간하면서 창간선물로 특이하게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준 적이 있었다. 시사지에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왜 창간선물로 주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 비디오를 구하러, 한밤에 잡지를 사러 서점으로 숨가쁘게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오페라 이마지나리아>(Opera Imaginaire)란 이 단편 모음집은 제목 그대로 주옥 같은 오페라 아리아의 선율에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한껏 실력을 발휘해 제작한 드문 걸작이다. 특히 노래의 분위기나 선율에 맞춰 컴퓨터그래픽에서 클레이메이션, 로토스코핑 등 다양한 기법을 적용해 애니메이션의 무한한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탁월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려는 작품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중 ‘당신은 나의 낭군’(Du Also Bist Mein Brautigam)이란 아리아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기하학적인 문양의 추상적인 배경을 움직이는 귀여운 캐릭터들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마술피리>의 음악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 유쾌한 단편을 제작한 이가 독일 출신의 중견 애니메이션 작가 라이문트 크루메(Raimund Krumme)다. 라이문트 크루메는 베를린의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는데, 그는 작품활동 외에 애니메이션 교육과 학술 세미나에도 정열적으로 활동을 하는 작가다. 어린이방송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가 하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애니메이션 교육과 세미나를 개최하며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애를 쓰고 있다. 유럽연합 산하 영화산업 지원기구인 ‘미디어 프로그램’의 하나로 애니메이션 작가집단 ‘카툰’(Cartoon)을 창립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활동 외에 작가적으로도 크루메는 단편애니메이션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크루메의 작품은 추상적으로 단순화한 배경과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매력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개 우리가 기존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관습적으로 길들여진 방향과 중력, 원근법에 대한 법칙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바탕이 등장인물들에게 때로는 얼음을 지치는 호수가 되기도 하고, 막막한 사막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대로 하얀 벽으로 움직이는 길을 막는 장애물로도 등장한다.

중국의 터웨이가 수묵애니메이션 <목적>에서 강을 건너는 물소의 모습을 하얀 여백 위에 드러난 뿔로 묘사했는데, 라이문트 크루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의 시각에 따라 캐릭터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등 애니메이션 속의 세계를 마음대로 ‘조작’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일정한 줄거리가 없고, 다양한 ‘상황’만 존재한다.

그의 80년대 대표작인 <줄타기 댄서>(Seilta(위에 점 두개, 움라우트를 찍어주세요)nzer)는 하얀 공간 위에 단순하게 검은 선으로 그려진 줄 위에서 캐릭터가 겪는 다양한 ‘상황’을 그리고 있고, 91년작 <교차로>(Kreuzung)는 네 갈래 교차로에서 만난 네명의 인물이 카메라의 관점과 배경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에 대처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 외에 그의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패시지>(Passage)나 <메시지>(Message)도 등장하는 상황만 다를 뿐,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은 유사하다.

그림이나 캐릭터, 이야기를 펼치는 방식이 일정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구체적인 배경과 캐릭터가 등장하는 다른 애니메이션과 사뭇 달라 까다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의외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한다. 라이문트 크루메는 인간이 겪는 대화의 단절과 왜곡, 소외, 위기상황에서의 본능적인 모습, 고독 등 가장 인간적인 정서를 애니메이션의 소재로 다루고 있다. 다만 다른 작가들이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풀어가는 반면, 그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애니메이션이란 상상의 도구로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 더, 서두에 언급한 <오페라 이마지나리아>를 혹 동네 중고비디오숍에서 발견하면 무조건 사세요. 라이문트 크루메 외에 지미 T. 무라카미, 모니카 르노, 파스칼 롤랭 같은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으니까요.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