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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동하고 싶다
2001-03-27

<닥터 Q의 신나는 병원놀이> 등 엽기만화, 그 가능성과 한계

하루하루 유행이 바뀌는 요즘 ‘엽기’라는 단어는 벌써 한물 간 느낌이 든다. 하지만 ‘엽기’는 여전히 우리 삶에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얼마 전 중학생이 어린 동생을 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은 원인이 ‘인터넷 엽기 사이트’ 때문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게임도 들먹였다. 엽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언어도 사회성이 있어 수없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디지털 콘텐츠, 인터넷 인프라, 정보고속도로, 모바일, IMT-2000 따위의 단어들은 그 느낌만으로도 21세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최근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어 자신의 의미를 확장시킨 단어이며 동시에 2001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단어를 꼽으라고 하면 역시 엽기가 제격이다.

취향을 넘어, 금기를 넘어

우리에게 엽기는 이미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 키치적 취향이나 엉뚱한 농담과 같은 취향의 영역에서 황당함이나 허무함과 같은 정서적 영역 그리고 배설물이나 죽음, 살인과 같은 금기의 영역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사용하는 문맥과 상황에 따라 그 스펙트럼은 만화경처럼 변화한다. 그래서 엽기라는 단어는 엽기적이다.

엽기만화의 범주도 매우 포괄적이다. 대략적으로 구분해 보면, ① 언더그라운드만화의 한 경향을 꼽을 수 있다. 주류 상업만화와 반대의 길을 걸어가는 언더그라운드만화에는 조악한 그림에 황당한 내용의 작품이 많았다. 신일섭 같은 경우는 왼손을 이용해 낙서 같은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② 패러디만화를 꼽을 수 있다. CF, 드라마, 영화의 장면들을 비틀어 자신의 작품에 삽입하고 그 권위를 부정하는 작품으로 고병규의 <파이팅 브라더>와 전상영의 <미스터 부>가 있다. ③ 배설물을 소재로한 개그만화가 있다. 아마오카 겐지의 <우당탕탕 괴짜가족>이 대표적이다. ④ 그러나 무엇보다도 엽기만화의 경지를 연 작품은 후루야 미노루의 <렛츠고 이나중 탁구부>다. 이 작품은 기존 만화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의 전개 방식과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관습을 무시하고 종횡무진 새로운 문법을 주조해 나간다. 표면적으로 배설물과 성적 농담을 소재로 주요 사용하지만, 일상에 대한 시니컬한 조소가 존재한다.

이들을 관통해 엽기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내는 핵심은 바로 ‘금기’에 대한 도전이다. 엽기는 우리가 접근해선 안 되었던, 혹은 그다지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낯선 영역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엄살씨, 병원에 가다

최근 웹진 코믹스투데이(www.comicstoday.com)에서 연재되다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닥터 Q의 신나는 병원놀이>는 한마디로 신체를 가지고 노는 만화다. 늘 어딘가가 아픈 엄살씨는 정체불명의 병원을 찾는다. 그곳에는 역시 정체불명의 닥터 Q와 조폭 출신의 양간호사가 근무한다. 그들은 엄살씨의 신체를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괴롭히고 거액의 치료비를 청구한다. 뜨거운 다리미로 심장 마사지하기, 자동카메라를 환자의 입에 집어 넣어 내시경 찍기, 호치키스(스태플러)로 상처 찝어놓기, 변기물과 세제로 장 세척하기 등 차마 글로 표현하기 힘든 방법들이 동원되는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엄살씨의 신체는 ‘몸’이라는 익숙한 관념에서 이탈해간다. 그 순간 이 만화는 엽기가 된다.

작가 신정원은 <나인>과 <오즈>를 통해 데뷔한 작가다. <오즈>에서 연재한 <요술공주 김이세리>와 <직장의 꽃>을 통해 이미 발칙한 상상력의 전력을 깔아놓았다. 이들 두 전작에서 신정원은 여성, 구체적으로 직장 여성에 대한 차별에 비수를 꽂았다.

다시, 감동이 그립다

웃기 위해서는 감동이 없어야 한다고 앙리 베르그송이 <웃음>에서 지적했다. 희극적이라는 것, 웃음이라는 것은 정서적, 감정적 움직임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초연해진 순간, 삶에 대해 무심한 방관자로 접근하는 순간 모든 것들은 우스워진다. 70, 80년대의 주류장르였던 명랑만화와 엽기만화가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명랑(明朗)은 밝고, 유쾌하고, 화창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허무 개그의 웃음이나 엽기만화의 웃음과 명랑만화의 웃음은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명랑만화는 만화를 읽는 독자들과 동질감을 조성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해 다양한 에피소드 속에서 일상의 정감을 전해준다. 그저 빙그레 웃음짓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반면 엽기는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립한다. 재조립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엽기가 유행하는 사회는 감동이 사라진 사회다. 감동이 없을수록 엽기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신정원의 <닥터 Q의 신나는 병원놀이>를 보면 역설적으로 감동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도, 보는 나도 모두 감동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