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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영화의 눈부신 결합
2001-04-19

사전 뛰어넘는 한국영화사의 경지, <여성영화인사전>

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만5천원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향해 가고 있는가?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 새로운 증거가 여기 나타났다. 1999년 제2회 서울여성영화제의 후속 사업으로 기획된 <여성영화인사전>이 애초의 기대를 뛰어넘는 빛나는 노작으로 2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특정 문화 혹은 예술에서의 진정한 문예부흥은 그 분야의 역사에 대한 이론적·실증적 연구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제목이 주는 인상 즉 많지도 않을 여성영화인의 인명을 사전적으로 나열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달리,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여성’을 키워드로 삼아 1950년대 이후 현대 한국영화사를 개괄해보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매우 생산적일 수 있다. 해방 뒤 한국영화는 대체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여성 관객에게 호소하는 여성의 산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을 비롯한 각 분야의 영화 인력이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에 여성영화인의 역할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영화인사전>은 이처럼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배제되고 주변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여성영화인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크린에 나타나는 여성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당대 영화와 관객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적·정서적으로 상호 작용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인이 경험한 모더니티의 실상에 접근하는 핵심적인 연구 영역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1990년대 중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영화 연구와 페미니즘의 결합이 이제 자생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저작 중의 하나다.

<여성영화인사전>은 구성 면에서도 독특하다. 우선 전체 4부로 구성된 책의 편제는 한국영화사에 대한 안목있는 시대구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제1부는 해방 뒤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중흥기로 진입하는 1954년부터 4·19를 정점으로 하는 1962년까지 다루고 있으며, 제2부는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중흥기이자 군사정권의 영화정책으로 인해 불안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제3부는 유신체제로 한국영화가 최악의 위기를 맞이했던 1972년부터 1979년까지를 다룬다. 1980년대를 다룬 제4부는 잔존하는 군사정권의 억압으로 인한 갈등과 새롭게 도약하는 영화의 힘을 기술했다.

각 부는 다시 세 종류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앞머리에 시대별 개관을 배치한 뒤, 가치있는 이슈들을 분화시켜 제기하고, 마지막에 그 당시 활동했던 여성영화인의 인명록을 달았다. 여성 인명록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부류가 배우라는 사실이 시사적인데, 이 때문에 인명록 자체가 캐릭터로 본 한국영화사에 가까운 모습을 취하게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러한 연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들여다본다면 이 책을 두고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 조짐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연구인력 면에서 주진숙 중앙대 교수, 변재란 박사 등 80년대에 성장한 신진 연구자 1세대가 정체성을 굳혔으며, 같은 시기 스타덤의 정점에 있다가 교육자로 변신한 장미희 명지대 교수는 자신이 활약했던 시기를 균형감 있게 성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젊은 연구자들이 집필한 글 역시 집단 연구의 장점과 위력을 보여주면서, 저널리즘 중심으로 진행되는 글쓰기와 차별화되는 범례를 제시한다.

또다른 장점은 이들이 취한 연구방법론이다. 페미니즘을 필두로 90년대 우리 사회에 소개된 영화연구 방법론들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으며, 문헌조사와 인터뷰 역시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기초 작업이다. 무엇보다도 수백편이 넘는 영화들을 직접 보고 소화했다는 사실이 탄탄하고 자신감 있는 필력의 기본이 되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조직들, 즉 서울여성영화제- 중앙대- 소도 출판사- 문예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을 연결시켜보면, 충무로 중심의 주류 산업 바깥에서 대안적인 영화문화를 ‘진흥’시킬 수 있는 인프라가 어떻게 꾸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즐겁지만 기나긴 작업”을 마무리한 필자들에게 축하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영상자료원에 잠들어 있는 한국영화 필름들이 한국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진정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연구자들만이 아닌 관객 대중의 손에 어떻게 가 닿게 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을 시작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김소희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