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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만들어봐!
2001-04-26

쾌락의 급소 찾기 29 - 가장 따라하고픈 DIY 만화는?

손에 잡히는 무엇이든 이리 비틀고 저리 고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하는 것은 만화가들의 근본적인 습성인 것 같다. 어쩌면 그들에게

만화는 직접 손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쳐놓을 수 있는 설계도나 스케치북과 같은 것은 아닐까? 주인공들이

입는 옷, 그들이 타는 색다른 디자인의 스쿠터, 가끔 들르는 근사한 카페의 인테리어… 그리고 그 만화가의 꿈을 대변하여, 자신의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는 매력 만점의 캐릭터들이 있다. DIY(Do It Yourself)의 욕망. 독자들의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를 한껏 북돋워주는

작품들이 있다.

만화 속 발명품, 현실인가 판타지인가

소년들의 창작 욕구를 가장 열심히 부추기는 것은 아마도 발명가나 엔지니어 주인공들일 것이다. 신기한 발명품으로 소년들을 꾀여내는 만화는

1970년의 <도라에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닥터 슬럼프>나 한국의 <요철 발명왕> 등이

바로 그뒤를 잇는다. 그 밖에도 <아기 공룡 둘리> 등의 어린이 만화들 중에는 어느 정도 발명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이들 작품에서는 예외없이 숙제를 대신해주는 연필, 시간을 거슬러가는 바이올린 등의 기발한 발명품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실상 먼

미래에서나 가능하거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허무맹랑한 것들이 대부분. 어린이들의 DIY 공작교실에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기한 발명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에 근접하는 것을 만들어보려는 시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닥터 슬럼프>에서는 자칭 ‘천재 박사’인 닥터 슬럼프가 만드는 갖가지 발명품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집안 일을 도와줄 미녀

로봇을 계획했으나,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번개가 쳐 잘못 태어난 꼬마 로봇 아라레. 그 밖에도 엉큼한 박사가 만드는 발명품들은 성적인 호기심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은데, 전반적으로 현실성 있는 발명이라기보다는 초능력과 판타지의 영역에 가깝다. 하지만, <닥터 슬럼프>에

나오는 ‘알몸을 들여다보는 투시안경’이 십여년 뒤 진짜 상품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발명 욕구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고철덩어리에서 인형까지, 모두가 욕망의 소재

반면에 윤승운의 <요철 발명왕>은 대단히 생활에 밀착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집 뒤쪽에 있는 벽돌을 빼서 비밀

작업실로 들어간다든지, 우산이나 라디오 같은 버려진 물건들로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동시대의 많은 어린이들이 충분히 따라해볼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멀쩡한 라디오나 TV가 고철덩어리가 돼버리기도 했지만.

이러한 꼬마 발명가들이 어른이 된 이후에는 허무맹랑한 발명보다는 가까운 곳에 있는 기계에 더 큰 관심을 쏟게 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오토바이나 자동차와 같은 살아 움직이는 기계는 마음을 쏙 빼앗는다. <아스팔트의 사나이> <이니셜 D>와 같은 레이서

만화의 경우에는, 자동차 개조와 튜닝이 꽤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른의 탈을 쓰고 있는 소년 발명가들의 욕망을 은근히 자극한다.

아이들의 방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인형’ 또한 많은 만화의 소재가 되어왔다. 그러나 귀엽고 예쁜 인형을 만드는 인형 예술가의 이야기보다는,

저주에 걸린 인형을 조종해 살인행각을 벌이는 인형 조종사의 이야기가 훨씬 자주 눈에 띈다. 하나부사 요코의 <인형의 집>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전래의 인형이 놀이와 장식 이전에 주술과 저주의 도구로 사용된 때문으로 보인다.

단순한 조종 인형만이 아니라, 인간보다 풍부한 감정을 가진 ‘살아 있는 인형’을 만드는 이야기도 종종 눈에 띈다. <나만의 천사>에

나오는 관상용의 아름다운 인형 역시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아니 정말 가능하다면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단백질 인형 역시 그러한 욕망의 소산은 아닐까?

적당한 가능성, 적당한 환상

여자아이들이 테디 베어나 봉제인형에 입맞추고 있을 때, 남자아이들은 로봇 만화의 프라모델 장난감에 미쳐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로봇 모형이 아니라, 진짜 거대 로봇을 만들어볼 꿈을 꾸곤 한다. <총?gt;에 등장하는 이드 박사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에 나오는 발란세 박사는 그들의 우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그들 스스로 만들 수 있는(Do It Yourself)

것일까?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서 묘사하듯, 어린 시절의 만화적 상상력에 경도되어 거대 로봇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진짜 공학도가 보았을 때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일지도.

그렇다면 진짜 따라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안노 모요코의 <젤리 빈즈>와 야자와 아이의 <파라다이스 키스>가 어떤

해답을 준다. 적당한 가능성과 적당한 환상을. 여자만화계의 최고 스타일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두 만화가가 지금 그리고 있는 작품은 모두

패션디자이너 지망생이 주인공. 한쪽은 시골 중학교에 다니는 작은 여자아이가 자기만의 옷을 만들며 언젠가는 도쿄에서 최고의 모델들에게 옷을

입혀볼 꿈을 꾸는 드라마. 또다른 쪽은 늘씬한 주인공들이 환상의 예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자기들만의 지하 아지트에서 화려하고 독창적인 드레스를

만들어내는 이야기. 환상의 사탕가루가 잔뜩 뿌려져 있지만, 그래도 소녀만화에 나오는 화려한 드레스를 꿈만 꾸다가, 직접 만들어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이들이야말로 진짜 DIY 만화다.

이명석 |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