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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희망의 음모
2001-06-14

영화음악 <진주만>

<진주만> O.S.T 워너뮤직 발매

한스 짐머는 쉬지 않는다. 지난해에 <글래디에이터>와 <미션 임파서블 2>의 음악을 맡아 동시개봉하더니 올해에는 <한니발>과 <진주만>을 연이어 맡는 정력을 과시하고 있다. 더군다나 <진주만>은 사상 최대의 돈을 투입해 만든 미국 최대의 블록버스터. 투입된 물량만큼 엄청난 스펙터클이 펼쳐지고 그에 걸맞은 웅장함을 갖춘 음악을 단시일 내에 만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한스 짐머는 너끈히 그 일을 해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음악들은 거의 ‘영화음악 공장’에서 스코어가 쓰여지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독일 태생인 한스 짐머는 그러한 공장 제작에 매우 친숙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가 시작한 일은 광고음악. 광고음악은 영화음악보다 훨씬 더 정교한 제작을 요한다. 타이밍도 잘 맞춰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작자의 의도에 잘 부합해야 한다. 이건 매우 특별한 재능이다. 요컨대 제작자의 의도 속에서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일 말이다. 언뜻 어불성설인 것 같지만 정말 그걸 잘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는다. 한스 짐머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대표자격에 속한다.

광고음악으로 꽤 성공을 거둔 뒤 한스 짐머는 유명한 버글즈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앨범 제작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버글즈의 이 앨범에서 커트된 동명의 싱글은 MTV에서 방영된 첫 비디오 클립으로도 유명하다. 그 명성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영화음악계에 데뷔한 그는 드디어 1988년 <레인맨>의 스코어를 통해 아카데미상 영화음악부문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면서 일약 최고의 영화음악가 대열에 오르게 된다. <라이온 킹>에서 절정의 실력을 과시했던 그는 21세기가 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바쁜 음악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번에 두개의 영화 스코어를 동시에 놓고 작업하는 일은 그가 생산해내는 영화음악의 양으로 보아 보통 일로 생각된다.

<진주만>의 백미는 역시 일본국의 진주만 기습장면이다. 그것 빼고는 볼 게 거의 없으나 그 장면이 워낙 압도적이라 영화에 대해 뭐라 평가해야 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진주만 기습장면은 하늘에서, 기울어져 가는 배 위에서, 물 속에서, 땅 위에서 끝도 없이 계속된다. 끝나나 싶으면 다시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고 또 끝나나 싶으면 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치 일본군이 아무리 폭격을 가해도 미국의 물량은 끝이 안 보인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 전투장면에 투입된 물량은 끝도 없다. 그리고 그뒤에, 음악은 거의 ‘무심’하게 줄줄 흐른다. 중요한 몇번의 동기화를 빼면 특별히 장면에 일치되는 것도 고려하지 않은 듯, 슬플 땐 슬프게, 무거울 땐 무겁게, 장중할 땐 장중하게 음악이 깔린다. 자, 이렇게 우린 너희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돈을 때려부으며 이 장면을 찍고 또 찍으니, 그냥 의자에 파묻힌 채 미국의 힘을 목격해라, 하고 약간은 따분하게 음악들이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전쟁영화답다는 생각이 들기조차 한다. 무수한 생명이 추풍낙엽처럼 지는 걸 무심히 목격하는 게 전쟁의 신 아닌가. 한스 짐머는 권태롭게 그 장면들을 구경하고 있는 전쟁의 신 옆에서 시중을 드는 음악의 종이다. 때로 피로감이 엿보이는 대목도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창의력’이라든가 ‘독창성’ 같은 말을 꺼내는 건 블록버스터에 대한 모독이다. 언젠가도 한스 짐머에 대해 쓰면서,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척척 해대는 프로페셔널 음악생산자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결국 그의 음악이 받쳐주고 있는 건 역시 천편일률성이다. 예를 들어볼까? 영화 끝장면에서 어린애가 나오면서 뻔한 희망을 암시한다. 음악은 별탈없이 흐르며 천편일률성을 방조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 뻔한 희망의 음모에 공조한다.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