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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에서 만난 사람들
2001-06-21

[해외 만화·애니]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그리고 풍성한 애니메이션.’

지난 6월5일부터 9일까지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갔다왔다. 오래 전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행사였지만 그동안 늘 마음만 앞서다가 드디어 25회째를 맞는 올해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

안시는 파리에서 테제베(TGV)로 4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스위스 접경에 위치한 작은 휴양도시이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아담한 규모, 평소에는 휴양 온 사람들 외에 외지 사람들을 쉽게 만나기 어려운 한가로운 알프스 자락의 마을이다. 그런 한적한 곳에 지난 4일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각국의 젊은이들과 작가들로 북적거리는 애니메이션 잔치가 열린 것이다.

올해 개인적으로 안시페스티벌에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미하엘 두독 드 비트의 <아빠와 딸>을 비롯해 필 몰로이 등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경쟁부문에 올랐기 때문이다.

다른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그렇듯, 안시 역시 외양만 봐서는 국제적인 행사가 벌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기는 하지만 아카데미나 칸영화제처럼 화려한 조명과 이벤트가 이어지는 그런 요란스러운 잔치와는 거리가 멀다. 히로시마페스티벌도 조촐하고 조용하지만 안시 역시 견본시가 열리는 MIFA 행사장을 제외하고는 덤덤한 분위기이다. 대신 문자 그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니메이션만 실컷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이다(첫 상영이 오전 10시30분, 마지막 상영이 밤 11시로 정말 원없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작품만 출품하는 히로시마에 비해 안시페스티벌에서는 유럽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인지 몰라도 말로만 듣던 작가들을 대거 만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작가들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팬으로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작품 시사를 마치고 행사장 앞에 서 있거나 노천 카페에 앉아 있으면 그동안 사진이나 작품으로만 접했던 거장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핀 스크린’의 대가 자크 드뤼엥, 아드만 스튜디오의 피터 로드, <무법자>의 아비 페이조, <줄타기 댄서>의 라이문트 크루메 등이 편한 복장으로 내 옆에 있는 것이다. 엽기적인 개그로 유명한 웨일즈의 작가 필 몰로이는 작품의 시니컬한 분위기와는 달리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았고, <가발제작자>의 스테판 쉐플러는 수줍고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몇몇 작가들과 직접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자리는 내가 왜 안시에 왔는지 그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뜻깊은 순간이었다. 모두 청바지에 셔츠를 걸친 편한 복장이었지만 저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와 딸>의 미하엘 두독 드 비트는 소탈하면서도 가식없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평소 피아노 연주를 즐긴다는 말을 들으며 왜 그의 영상이 음악과 그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난 기념으로 그가 페스티벌 도록에 사인과 함께 그려준 <수도승과 물고기>의 그림은 전혀 기대치 않았던 선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돌연변이 외계인>의 빌 플림턴은 작품의 떠들썩한 분위기에 어울리게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지닌 정력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얼핏 코믹스러워 보이는 그의 이면에는 독립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고집이 숨어 있었다. <러그렛츠>와 같은 TV시리즈를 감독하면서도 <날으는 난센>과 같은 인상적인 단편을 발표했던 이고르 코발료프는 냉소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이 이야기에서 묻어났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열린다. 올해는 우리의 애니페스티벌에서도 그런 작가들과의 즐거움 만남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