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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의 첫 연재만화 <리얼퍼플>(Real Purple)
2001-07-12

사랑에 관한 낯익은 풍경

사랑은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진부하고, 상투적이며, 유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가득하다. 게다가 나이를 먹어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뒤라면, 사랑이야기는 더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리얼퍼플>(Real Purple)의 도입부는 사랑이야기에 대한 낯익은 대화로 시작된다. 멜로영화를 본 뒤 표 산 돈이 아깝다며, 한결같이 그 내용이 그 내용인 상투적인 사랑이야기에 대해 모두 새빨간 거짓말 같다는 감상이 이어진다. 그러나 희원은 “진부한 사랑이라 해서 모두가 진실이 아니란 법은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상투적인 이야기라도 세상엔 정말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도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얼퍼플>은 2000년 서울문화사의 신인만화대상으로 데뷔한 24살 신출내기 작가가 그린 첫 연재만화다. <영혼 결혼식>이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뒤 <우물> <멍>과 같은 단편을 발표한 박소희는 평번한 일상이 나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내 감정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소모된다, 그리고 충전된다

어머니가 이혼한 뒤 재혼한 새아버지 가족과 함께 4년째 살고 있는 희원은 휴학하고 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어린 시절 지하 광에 갇힌 뒤 빛 하나 없는 어둠에서 죽음을 느껴버린 희원은 어둠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4개월 반 차이가 나는 의붓동생 인혁은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땀, 매미소리, 향냄새, 태양의 열기, 소복자락과 같은 이미지에 웃음과 같은 감정의 표현을 빼앗겨버린 인물이다.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는 둘은 상대방에 대해 미묘한 감정의 떨림을 느낀다. ‘의붓남매의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지극히 상투적인 사랑이야기지만 작가는 그 안에 진실을 담았다. 스무살 초반의 주인공 희원과 인혁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서로에게 무심히 상처를 주고, 스스로 상처를 받는다.

부모의 이혼. 새로 만난 가족. 잃어버린 가족. 그리고 새로 만난 가족만큼 새로 생긴 복잡한 감정, 잃은 가족만큼 잃어버린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얽혀 <리얼퍼플>을 끌고 간다. 산다는 것은 결국 관계와 관계,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고리들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감정이란 것이 명쾌하게 판단하고, 경계를 지어 밀어붙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고통과 아픔이 따른다.

작가 박소희는 <리얼퍼플>을 통해 그/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멜로물의 경우 주로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데 비해, <리얼퍼플>은 그/그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그 혹은 그녀라는 명확한 성의 구분이 아니라 바로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그/그녀다.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굴곡. 예외적인 그와 그녀가 아닌, 보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감동을 주는 까닭은 바로 예외성이 아닌 보편성, 만화를 읽는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울림 때문이다.

“사랑이란 감정도 소모가 되는 걸까요?” 희원의 질문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그러면 언젠가는 모든 게 바닥나겠지.” 희원의 대답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그 순간 죽을 것처럼 나를 괴롭히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깨끗하게 방전되어버리는 감정이다. 그리고 바닥이 난 줄 알았던 감정도 어느새 새롭게 살아나 나를 괴롭힌다. 그렇게 사랑의 감정은 소모되다가도 충전되고, 깨끗이 방전된 뒤에도 다시 살아나고 증식한다.

<리얼퍼플>은 대사와 내레이션과 함께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미묘한 감정변화를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새로운 남편의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잘하는 희원 어머니의 경우 얼굴의 일부분만 클로즈업해 가려진 감정의 그늘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1권만으로 이야기의 윤곽을 완전하게 잡아내기는 힘들다. 희원과 인혁의 이야기말고도 나와야 할 이야기가 많다. 희원의 친부와 친동생 주원의 이야기, 희원의 새 가족들과 어머니의 이야기, 채영과 재신의 이야기 등이 더 진행돼야 한다.

<리얼퍼플>, 부디 완결될 수 있길

하지만 <나인>이 폐간된 이후 <리얼퍼플>의 완결도 기약할 수 없게 돼버렸다. 안타까운 만화계의 현실이다. IMF 시절, 대여점이 신규창업아이템으로 각광받으며 늘어난 뒤 만화시장은 헤어날 수 없는 불황의 늪으로 빠져버렸다. 휴대폰, 인터넷, 게임과 같은 만화를 대치할 새로운 엔터테인먼트가 등장하면서 만화는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한 작가가 탄생하고,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근원적인 유통구조가 붕괴돼버린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상업잡지로 다양한 시도를 거듭한 <나인>의 실험이 좌초되고 만 것이다. 잡지를 통해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작가의 만화책을 구입하는 즐거움은 어디서 돌려받아야 하나. 여러 독자들이 함께 만화를 사서 보면, 출판사가 볼 만한 만화를 사고 싶게 만들어주면, 평론가들이 좋은 작품을 열심히 소개하면, 언론에 만화지면이 늘어나면,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그리면, 대여점이라는 모순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리얼퍼플>을 보며 깊이 고민해본 문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