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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만화애니...여성 작가는 ‘페미니즘’만 외친다고?
2001-07-19

애니메이션계의 여걸들

많은 여성 애니메이션 작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의 불평등문제나 자아의 정체성, 미디어에 의해 왜곡된 여성관 등을 즐겨 소재로 다룬다. 지난주에 언급했던 모니크 르노나 앨리슨 드 비어, 수잔 피트 등이 대표적인 페미니즘 성향의 작가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인 경향은 종종 여성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작품을 여성운동의 연장선에서만 바라보는 시각도 낳았다. 즉 여성 작가들은 모든 사회적 현상을 늘 ‘여성’이라는 틀을 통해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여성 작가들이 작품의 기저에 페미니즘 성향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작품들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영국 출신의 조아나 퀸은 페미니즘의 시각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날카로운 시대인식과 풍자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녀의 초기 대표작 <브리타니아>는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우화적으로 비판한 수작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문화와 풍습, 상징들이 사실 다른 나라의 부와 권력을 도둑질해서 얻은 것에 불과하다며 통렬하게 조소를 퍼붓는 그녀는 이런 영국의 부도덕함은 나중에 정의에 의해 심판받을 것임을 작품 말미에 암시한다.

이어 발표한 <바디 뷰티플>에서는 다이어트와 화장을 통해 외형적인 미에 집착하는 현대여성들의 속물성을 비꼬고 있다. 영국의 봅 고드프리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이러한 사회비판은 카툰 스타일의 그림과 어울려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표한 TV물 <페이머스 프레디>에서는 기존에 보여준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사라지고 미국 TV단편을 연상시키는 질펀한 노래와 의미없는 익살을 선보여 아쉬움을 주고 있다.

95년 안시페스티벌과 96년 히로시마페스티벌을 모두 석권한 <레페테>(Repete)를 만든 체코의 미카엘라 파블라토바도 유념할 만한 여성 작가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애정문제를 여러 사건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순환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다룬 <레페테>는 탄탄한 구성과 함께 사회를 바라보는 깊이있는 시선이 호평을 받았다.

우리가 좀처럼 접하기 힘든 핀란드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인 카타리나 린퀴스트는 인형이나 클레이애니메이션을 주로 하는 작가이다. 대학 시절 프라하의 이지 트른카 스튜디오에서 공부한 그녀는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소재를 즐겨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챔버 스톡>이나 <간호사와 병사>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애니메이션 인형의 대표적인 제작사인 ‘매키논 앤 사운더스’사의 정교한 수제 인형과는 사뭇 다르다. 거칠고 음산한 느낌의 캐릭터들은 마치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부서진 인형 같은 피폐하고 외로운 느낌을 준다. 분위기나 내용적인 면을 따진다면 퀘이 형제의 작품과 유사한 경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퀘이 형제의 작품들이 탐미적이면서 암울한 ‘백일몽’의 세계를 다룬다면, 린퀴스트는 스산한 영상 속에서 따스한 인간애를 추구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안 브롬보는 영국 애니메이션 특집을 할 때 조아나 퀸의 작품과 함께 단골로 선정되는 <작은 늑대>의 작가이다. <작은 늑대>는 ‘늑대는 밤에 달을 바라보며 운다’는 선입관에서 출발한 소품이다. 파격적인 영상이나 기발한 유머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화같은 포근한 이야기와 천진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는 보는 이의 입가에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한편 작품을 직접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가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계에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독보적 영역을 쌓은 여성들도 있다. 네덜란드의 시리아 반 딕은 유럽 단편애니메이션의 대표적인 제작자 겸 배급자이다. 남편 제릭 반 딕과 함께 많은 단편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배급했다.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안나와 벨라>를 비롯해 <다다> 등이 그녀가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 반핵 작품으로 유명한 기노시타 렌초의 <피카돈>을 수입해 유럽에 처음 소개한 이도 그녀이다.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인 ‘SAS’의 핵심멤버인 제인 필링은 ‘브리티시 필름 인스티튜트’를 비롯해 <채널4>, <BBC> 등에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과 컨설턴트 페스티벌 디렉터로 활약하는 학자이다. 그녀가 SAS 출신 학자들의 논문을 모아 펴낸 는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애니메이션계 신인들을 소개할 때 언급한 모린 퍼니스도 애니메이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최근 번역 출판된 <움직임의 미학>의 저자인 그녀는 예술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다루는 잡지 <애니메이션 저널>의 발행인이기도 하다(이 밖에 2000년 히로시마 대상작 <하루를 시작할 때>(When the Day Breaks)의 아만타 포비와 웬디 틸비, 아카데미 수상작 <밥의 생일>의 앨리슨 스노든, <기쁨의 거리>(Joy Street)의 수잔 피트, <바보들의 마을>(Village of Idiots)의 로즈 뉴러브도 주목할 만한 여성 작가이.).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