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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드로엥
2001-02-15

핀의 힘, 판화의 맛

이 잡지에 글을 쓰는 문화평론가 오은하씨가 <치킨 런>에 대해 쓰면서 말했듯 애니메이션 창작이란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1/12초, 1/24초 단위로 나누어 표현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셀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키 애니메이터를 중심으로 분업이라도 가능하지만, 다른 분야는 그나마도 쉽지 않다. <치킨 런>과 같은 클레이메이션이나 컷아웃 기법의 종이 애니메이션은 한달 내내 작업해야 고작 십몇초의 분량밖에 제작하지 못한다. 진짜 오은하씨의 말처럼 ‘닭살돋는 작업’이다.

애니메이션 기법 중에 ‘핀 스크린’(Pin-screen)이 있다. 이름 자체도 그다지 익숙하지 않고, 실제로 이 기법으로 만든 작품도 그리 많지 않아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애니메이션 장르이다. ‘핀 스크린’기법이란 하얀 판 위에 수천개에서 많게는 1만개 이상의 얇은 핀을 꽂고 옆에서 비추는 조명의 각도와 세기, 핀의 높낮이, 기울기 등을 이용해 판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기법이다. 이름만큼이나 제작방식도 생소한 이 기법은 주로 흑백이나 회색 영상이 만들어지는데, 섬세한 명암의 변화와 선의 부드러움이 빼어나다. 언뜻 목탄 스케치를 보는 듯 두툼한 질감과 영상의 깊이는 다른 기법이 따라오기 어렵다. 하지만 ‘수천개의 핀을 꼽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수공예적 작업인데다 특성상 여러 사람이 분업으로 할 수도 없다. 그나마 셀이나 클레이애니메이션은 중간 수정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의도와 다른 영상이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사찰에서 면벽하며 용맹정진하는 수도승의 자세가 아니면 하기 힘든 제작기법이다.

그래서 그럴까? 개발된 지 70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핀 스크린’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사람은 손에 꼽힌다. 이 기법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알렉산더 알렉세이예프. 그는 미국인 동료인 클레르 파커와 1933년 무소르그스키 음악에서 모티브를 딴 <민둥산의 하룻밤>을 ‘핀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해 호평을 받았다. 이후 핀 스크린 기법은 알렉세이예프의 수제자인 자크 드로앵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74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해 76년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로 주목을 받은 그는 현재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스승의 기법을 한 단계 발전시켜 흑백영상만 가능하던 핀 스크린에 색채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그는 색채 핀 스크린의 환상적인 영상과 동유럽 인형애니메이션의 우아한 동작을 접목시켜 새롭게 장르를 발전시켜 나갔다. 케이블TV의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나 교육방송의 <애니토피아> 같은 프로그램에서 가끔 접할 수 있는 <밤의 천사>(Nightangel)는 드로앵의 실험정신이 빛을 발한 수작이다.

수공예적인 작업방식에다 대부분 혼자 해야 하기 때문에 핀 스크린은 아무래도 탐미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은데, 드로앵은 기법이 지닌 영상의 깊이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도 곧잘 던진다. 95년 보스니아 내전을 소재로 한 <엑스-차일드>(Ex-child)가 대표적인 예이다. 전쟁을 동네에서 친구들과 벌이는 놀이쯤으로 알던 소년이 전장에 내던져지면서 전쟁의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대사 한 마디 없는 5분짜리 흑백 단편이다. 하지만 핀 스크린의 심도깊은 표현력으로 펼쳐지는 영상은 흡사 오윤의 판화를 연상케 한다. 조각도로 힘주어 깊게 파내려간 것처럼 인물들의 표정은 생생한 선으로 살아 있고, 그 얼굴에 배어 있는 공포와 절망, 분노는 셀 애니메이션으로는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에 와닿는다.추신. 지난호 설 특집 비디오 가이드에 소개한 작품 중 ‘만화의 세계’에 드로앵의 대표작인 <밤의 천사>가 있다. 꼭 놓치지 않고 보기를 권하고 싶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