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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보다 온기
2001-03-08

해외 만화, 애니 / <거리> <두 자매>

지금은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의 배움터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한겨레문화센터 애니메이션 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이다. 당시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주)서울무비의 기획실을 찾았다가 애니메이션 학교 1기생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곳을 마치면 뭐할 거예요?” “독립 애니메이션 작가로 활동하고 싶어요.” “그러면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예요?” “캐나다의 캐롤라인 리프가 좋아요.” “어떤 점이 좋은데요.” “사람에 대한 진지한 시선이 아름답잖아요.”

솔직히 이때 머리가 ‘띵’한 충격을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라면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나 디즈니 정도를 말할 줄 알았던 22살의 여학생이 당당하게 캐롤라인 리프의 이름을 말하는 것에 ‘너희가 애니메이션에 대해 아느냐’라며 내심 우쭐했던 자만심이 깨졌던 것이다.

지금도 크게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일반 학생이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 그것도 상업 애니메이션이 아닌 단편 순수 애니메이션을 구해 본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캐나다 여류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애니메이터의 꿈을 키워온 그 학생의 당찬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가 배출한 스타 작가 중 한명인 캐롤라인 리프는 지금도 국내 애니메이션 작가 지망생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외국 작가 중 한명이다. 하지만 지명도에 비해 그녀의 작품은 일반인에게 그리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작품에는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개그나 유머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필립 멀로이처럼 엽기발랄한 재치도 없고, 프레데릭 벡처럼 구도자적인 엄숙함도 없다. 물론 매끈하고 수려한 그림체는 더더욱 아니다. 리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거리>나 <두 자매> <변신>에 나오는 ‘등장인물’(캐릭터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아서)들은 투박한 선에 뭉툭한 몸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다른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스한 온기와 섬세한 감성이 숨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온화한 가족주의로 무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온기라 함은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들이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갈등을 너무나 잘 표현하기 때문에 느끼는 ‘체온’이다.

캐롤라인 리프의 애니메이션은 삶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그것을 표현하는 연출력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절대 과장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작품은 그래서 ‘문학적’인 서정성이 듬뿍 배어 있다.

기법면에서 흔히 캐롤라인 리프는 ‘페인트 온 글라스’의 대가로 꼽힌다. 실제로 리프는 많은 작품을 ‘페인트 온 글라스’ 기법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같은 페인트 온 글라스 기법이라도 이 방면의 또 한명의 거장인 <노인과 바다>의 알렉산더 페트로프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페트로프가 유리판에 퍼지는 유화의 질감을 바탕으로 깊이있는 영상을 추구하는 데 반해, 리프는 이 기법이 갖고 있는 부드러운 화면 톤과 은유적인 표현력을 강조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앞둔 가족들의 다양한 내면을 9살 소년의 눈으로 그린 <거리>는 그녀의 그런 특성을 잘 느낄 수 있는 페인트 온 글라스 기법의 수작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죽음이라는 인생의 큰 사건 앞에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캐롤라인 리프는 페인트 온 글라스 외에 ‘다이렉트 애니메이션’ 기법에도 능숙하다. 다이렉트 애니메이션은 검은색으로 칠해진 35mm 필름을 날카로운 펜으로 긁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스크래치 온 필름’으로도 불린다. 그녀의 또다른 대표작 <두 자매>가 다이렉트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자매 바이올라와 마리에가 어느 날 낯선 이방인을 맞으면서 겪게 되는 혼란을 그린 이 작품은 두 여성이 느끼는 심리적 갈등의 변화를 검은 필름 위에 그린 그림이 잘 표현하고 있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