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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운명을 건 게임
이다혜 2017-05-22

<폰의 체스> 파올로 마우렌시그 지음 / 민음사 펴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싶다면 높이 올라가보면 된다. 전망이 바뀌면서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동정, 자비, 사랑은 상대적이고 우연한 상태이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게임 중에 희생된 체스 말에 대해 사랑이나 동정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폰의 체스>의 한 대목이다. 하지만 체스 말로 진짜 인간을 움직이거나, 혹은 죽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본 옴니버스영화 <기묘한 이야기> 중 한국 개봉판에서는 빠진 <체스>라는 작품이 있다. 이 드라마는 체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말을 희생해서라도 적의 킹을 뺏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 바로 체스라고. 실제 이야기가 시작되면, A.I.와의 대국에서 인간 최초로 패배한 주인공이 폐인처럼 살다가 기묘한 체스 게임에 초대받게 된다. 인간이 체스의 말이 되는 인간체스를 두는 것이다. 만일 C4 위치에 있는 백의 폰이 공격받으면 그 자리의 인간이 칼에 찔려 죽는다. 체스 공포증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감정을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파올로 마우렌시그의 <폰의 체스>의 도입부 역시 체스와 관련한 유혈사태를 언급한다. 체스가 처음 술탄의 궁전에 소개됐을 때 술탄은 체스 발명자에게 상을 주고자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겠노라 했다. 체스 발명자는 겉보기에 아주 소박한 보상을 요구했다. 체스보드 예순네칸의 첫칸에 낱알 하나를 놓고, 두 번째 칸에는 두알, 세 번째 칸에는 네알 이런 식으로. 그렇게 곡물을 지급했다간 세상 모든 곡물로도 감당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술탄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체스 발명자의 목을 베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디터 프리슈라는 남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건강했으며 체스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게임이 한창 복잡하게 진행되어 말이 이동해 있는 체스보드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폰의 체스>는 그 상황에서 시작, 프리슈를 죽게 한 남자로, 그리고 그 남자를 움직인 또 다른 남자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가며 진행된다. 게임을 진행하는 스타일이 체스 선수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면, 우리는 이 세 사람으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책 표지며 띠지에 적힌 대로,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유대인 수용소의 밤에 도달한다. 체스가 모의 전쟁이 아니라 정말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게임이라면 그에 따른 복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폰의 체스>는 체스라는 게임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한손에 쥐고 소설 속 인물들을 신중하게 움직인다. 여기서 잡아야 할 킹은 누구일까. 그 사람의 성격이 체스를 플레이하는 방식에 반영된다면, 그런 디테일을 어렵지 않게 소설 형식 안에 담아낼 방법은 어떠해야 할까를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체스를 어느 정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이다. <미생> 챕터마다 초입에 있는 박치문 한국 기원 부총재의 기보 해설처럼, 술술 읽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난관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은 적절히 배분된 미스터리의 관문들이다. 누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누가 왜 죽였는가. 누군가가 죽은 자를 찾아왔다, 그는 누구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죽은 자에게는 해묵은 인연이 하나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나를 풀어내면 또 하나의 매듭이 나타난다. 그렇게 <폰의 체스>는 홀로코스트를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뉴욕타임스>는 이 소설이 “에드거 앨런 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는데, 아마 포를 포함한 장르소설 독자라면 스티븐 킹의 <금연주식회사>를 몇 가지 측면에서 떠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에는, 살아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로 남는다는 일의 절박함에 눈길이 가리라. 과거가 아무리 아득해 보일지라도 충분히 청산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전히 현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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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건 게임 <폰의 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