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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은주의 영화>
이다혜 사진 백종헌 2019-09-17

<은주의 영화> 공선옥 지음 / 창비 펴냄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추억을 회상하는 목소리로 시작하는 소설 <은주의 영화>는 은주가 아버지와 극장에 갔던 추억을 떠올리는 중이다. 영화보다 중요했던 것은 영화를 보고(제목이 기억나지 않음) 아버지와 찻집에 가 아이스크림을 먹던 추억이나, 또 영화를 보고(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 아버지와 중국집에 가 짜장면을 먹던 기억이다.

어머니를 처음 본 순간 반한 일을 “거의 영화였다, 영화였어”라고 추억하거나, 딱히 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은주야, 너도 저런 영화 하나 만들어볼래?”라고 말하는 아버지. 그런데 이런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서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그런 어머니를 찾겠다고 무작정 따라나선 아버지는 근무지 무단이탈로 해고되었고, 이모는 어쩌다 다리를 절게 되었고, 그런 것을 영화로 찍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순간들은 영화였다, 영화였어. 그 ‘영화’라는 단어 뒤에 숨은 곡진한 사연이 뒤를 잇는다. 그래서 은주는 영화를 만들게 될까.

공선옥의 소설을 읽으면 전라도로 가는 완행열차에 탑승하는 기분에 빠지곤 한다. 기차 안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말로 가득하고, 옆자리 사람이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동안 나는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듣게 된다. 어떤 소설이 그 사람 삶의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만 떼어 라벨링한다면, 공선옥은 한 인간이라는 역사 안에서 개별적인 사건들을 슬쩍 들려주고 사라진다.

무심하게 스쳐갈 때 보이지 않던 풍경이, 호남 방향의 완행열차 바깥의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그제야 제대로 보이는 기분이다. <은주의 영화>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등을 쓴 공선옥의 새 소설집이다.

그 동네 남자들

이 고장 남자들은 울지 않고 화를 낸다. 그놈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단다, 이가 갈려. 외삼촌이 말하는 그놈은 우리 아버지다. 나는 신작로를 달려 도라지밭 앞에서 멈춘다. 입술을 달싹여 어머니를 불러본다. 어머이. 도라지밭은 조용하다. 나는 저수지 둑 위로 잽싸게 올라선다. 저수지 물은 검다. 검은 물은 조용하다.(<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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