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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빛의 과거>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백종헌 2019-09-17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기억은 재편되고 조작된다. 나에게 유리하게.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감정은 당연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을 같이 겪은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사건’의 팩트까지 서로 다르게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난 그런 적 없어. 그건 네가 그랬지.” 오랜 친구 사이에 이런 말다툼은 매우 비일비재하다. 은희경의 신작 <빛의 과거>는 기억의 재편에 대한 소설이다. 1977년 함께 여자대학교 기숙사에 살았던 나, 김유경은 2017년에 그시절의 친구 김희진이 출간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친구 김희진의 소설에서 나는 내가 기억하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묘사된다.

80년대생인 여성 독자들에게는 각자의 ‘은희경’이 존재한다. 나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통해 ‘자아’라는 말을 처음 알았고, 나와 나의 자아를 분리해 영혼을 보호하는 것을 배웠다. <새의 선물>의 진희가 냉소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바라봤다면 <빛의 과거>의 ‘나’는 자신을 타자화한 친구의 글을 통해 과거의 자신과 대면해야만 한다. 20대 또래 여성들이 모인 기숙사에서, 개성적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제각각의 여성들은 시대와 마찰하거나 타협하며 다음 페이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서 그녀들은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나와 다른 세계와 섞일 것인지 튕겨져 나갈 것인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될 것인지 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무수한 선택들로 유경, 희진, 성옥, 애란, 선미 등의 여자들은 서툴게 앞으로 나아간다. 1977년 기숙사라는 집단에 살았던 여자들의 내면에 접촉하는 일은 영화 <벌새>의 은희를 떠올리게도 한다. 가장 개인적인 소녀의 일상을 통해 1990년대를 구현했던 영화처럼 <빛의 과거>가 재구현한 시대 역시 아릿한 우리의 이야기다.

순종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 모범생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와 고향을 떠나는 순간 거짓 순종과 작별할 생각이었다.(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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