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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빌리 엘리어트>
2001-03-22

작은 이야기 속 큰 혁명

<빌리 엘리어트> O.S.T/ 유니버설 발매

영화는 직설적이다. 80년대 초 영국, 경기침체 속에서 파업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철의 여인 대처는 강경 대처로 일관한다. 이 영화 속에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가 맞물리는데, 큰 이야기는 결국 노조가 굴복하고 노동자들은 일을 재개한다는 착잡한 내용이다. 작은 이야기는 그

한가운데에 있는 한 노동자 가정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아버지와 큰아들은 큰 이야기의 대의명분을 따른다. 작은 이야기의 핵심은 작은아들의

‘발레’이다. 어쩌면 큰 이야기는 결론적으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큰 이야기는 절망에 빠지고 말지만, 작은 이야기는 희망 속에서 지속되고

우리의 인생은 그 속에서 빛을 발한다.

음악 역시 직설적이다. 발레장면에는 <백조의 호수>가 쓰이고 데모장면에는 펑크가 나오고 춤출 때는 <부기를 좋아해>가 나온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영국에서 유행하던 음악들이 그대로 쓰여 당대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영화에 도입되는 방식,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의미화되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니, 실은 단순하게 적용되었다고 해도 그 당시의 상황 자체가 그렇지 않다.

이른바 ‘글램 록’ 스타일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대표적인 밴드인 ‘티-렉스’(T-Rex)의 음악이 전체적으로 음악을 끌고 간다. 첫 장면에서부터

티-렉스의 <코스믹 댄서>가 흐르는데, 티-렉스의 스타일은 글램이 디스코로 넘어가는 다리쯤에 해당한다. 그들의 음악은 한편으로는 단순한

‘파티음악’이면서, 다른 한편 성적 정체성의 거의 완전한 균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는 첨예하게 정치적이다. 그런데 그 정치성은 ‘작은 이야기’의

의미에서만 기능하다는 것이 특이하다. 큰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는 완전히 무시되거나 논외가 되어버린다. 남자 아이 빌리가 꿈꾸는

‘발레 댄서’가 큰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듯(빌리의 아버지는 ‘남자라면 축구나 권투, 레슬링을 해야지!’하고 말한다),

티-렉스의 짙은 화장 속에서의 파티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기껏해야 ‘비정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비정상’은 어른들의 비위를 거스른다.

빌리가 발레를 한다는 것을 아버지는 용납하지 못한다. 큰 이야기는 그런 ‘비정상’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비정상은 큰 이야기에 반기를

든다. 이제 티-렉스가 <혁명의 아이들>(Children of Revolution)이라는 노래를 서정적으로, 사이키델릭하게 만들어 불렀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빌리가 티-렉스의 노래를 틀어놓고 침대에서 쿵쿵 뛰며 춤을 춘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LP는 형의 것이다. 형은

빌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티-렉스의 노래를 들으며 마리화나를 피우는 일은 즐긴다. 풍속의, 작은 이야기의 혁명이 스타일, 팝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든다.

계속하여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에서는 클래쉬의 <런던 콜링>이 쓰인다. 이건 클래쉬가 70년대 후반의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밴드였다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선택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직선적인’ 영화가 왜 클래쉬를 음악적 주인공으로 선택하지 않고 티-렉스를

선택했을까. 내 생각엔 이 대목이 재미나다. 그것은 상당히 섬세한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당시는 큰 이야기(예컨대

노조의 파업)의 대의명분이 깨지는 대신 안쪽으로 작은 이야기의 혁명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관점이 있다. 그 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일견 스트레이트하지만

알고 보면 복잡하다. 끝판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발레리노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받쳐주는 음악이 가장 유명한 발레곡인 <백조의 호수>인 것도

너무 당연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노동자의 꿈속에 있던 ‘발레’가 현실화되는 과정과 <백조의 호수>는 어딘지 내적인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당연한 것 가지고 쉽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 같지만 그 밑에 있는 생각은 은근히 복잡하고 괴팍하다. 영국 사람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