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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개구쟁이
2001-03-23

쾌락의 급소 찾기 26 - 가장 싱싱한 노인 캐릭터는?

저녁 5시 무렵 지하철 1호선을 타면 묘한 위화감이 열차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고다 공원에 있다가 퇴근 시간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 할아버지들 때문인지, 열차 안의 평균 연령은 아무래도 60세를 상회한다. 이곳에서는 경로석은 물론, 일반 좌석에 앉아 있는

것조차 꿈꾸지 말아야 한다. 자칫 젊은 녀석이 졸면서 앉아 있다가는 일장 훈시는 물론, 자리를 양보한 뒤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전철을 타고

가긴 어렵다. 도합 수백년을 살아온 눈동자들이 그 ‘범죄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에서 벗어나면, 그곳이 제법 싱싱한 활기로

들썩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논쟁이라도 벌어지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달려드는 할아버지들은 흡사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장난꾸러기 같다.

그러나 그들만의 리그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그곳을 벗어나면 축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쓸쓸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때로는 스승, 때로는 친구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놀아대는 만화 판에서도 노인들은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주인공을 맡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인생의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비춰줄 햇볕이 없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꾸부정한 허리를 지팡이로 일으켜 세우며 맹렬히 독자들에게

달려가는 노인들이 있다.

<드래곤 볼>의 무천 도사는 만화 속에서 등장하는 가장 전형적인 노인 캐릭터 중 하나다. 머리가 벗겨진 대신 백발의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고,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로 치켜세우고 있는 무천 도사는 전통적인 ‘사부’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젊은 여자만 보면 사죽을

못쓰는 ‘색정광’인데다가 상당히 비겁한 면모까지 가지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소년 주인공들보다 철딱서니가 없기까지 하다.

사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가장 편안한 존재일 경우가 많다. 중년의 아버지, 어머니가 지닌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아이들의 방패막이를 해주며 같이 장난을 즐길 수 있는 친구. 어떤 나쁜 짓도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 용서가 된다.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

할아버지나 <마스터 키튼>에 나오는 키튼의 아버지는 모두 다 장난꾸러기에 여자를 밝히는 노인이다. 위기가 닥치면 능글맞게 사태를 피해가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지만,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부리지 않는 면에서는 매우 친근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무천 도사가 보여주는 노인의 상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 <취권>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이미 동양의 무술 세계에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바보 같거나 괴팍한 짓을 하는 노사부의 상이 자리잡고 있다. <머털도사> <임꺽정> 등으로 이어진 이두호의

여러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스승의 모습은 잘 재현된다. 특히 <임꺽정>의 떠벌 스님은 꺽정으로부터 여러번 의심을 살 정도로 기이한 행동을

하지만, 중요한 시점에 ‘따끔한 한마디’를 할 줄 아는 ‘스승’이다. 무천 도사는 이러한 노 스승의 권위를 이어받고 있지만, ‘색정광의

기행’에 비해 ‘스승의 따끔함’은 부족한 편이다. 요즘의 아이들은 야단치는 스승을 원하지 않는다. <슬램덩크>의 감독님처럼 한때 호랑이였을진

모르지만, 지금은 턱을 잡아서 늘여도 아무 말도 않는 편안한 노인이 좋은 것이다.

권력의 주변,영원한 아웃 사이더

사실 위엄과 권위의 노인들은 만화 속에서 매우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언제나 미성년의 소년소녀가 주인공인 동아시아 만화의

전통 상, 그들의 반대편에는 늙고 파렴치한 악당을 배치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총몽> 등의 SF 작품에 등장하는 미친 노 과학자의 이미지는

매우 전형적인 것이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생리요법으로 수명을 간신히 유지해 나가는 신성황제가 나오는데, 그 역시 젊은 날에는

나름의 건전한 야망을 품었었지만 그것이 좌절된 후 자신의 지식과 권력을 그릇된 방향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일본, 중국, 한국

할 것 없이 정치와 경제의 중추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동아시아 늙은 권력자들의 실체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와 우리 주변의 노인들을 둘러보자. 권력의 핵심에 닿아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그들은 사실 아무런 힘도 의지도 가지지 못한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그들이 소리칠 수 있는 곳은 지하철 경로석 앞뿐이다. 황미나의 <이씨네 집 이야기>에 나오는 치매 걸린 할머니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노인의 상일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꼬박꼬박 졸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그들이 만화라는 활력의 장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어쩌면 ‘개구쟁이 노인’이라는 반치매의 상태에 빠져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인의 정체성을 잃지 마라

살아남으려면, 젊은 주인공들과 어울리려면, 스스로 어려져라. <멋지다 마사루>의 사미자 교장처럼, 언제 혼령이 빠져나갈지 모르는 몸을 하고도

그들의 무의미한 애교 코만도 행각에 동참하라. <마법진 쿠루쿠루>의 북북춤 할아버지 훌리오처럼 자신의 무가치함을 끊임없이 증명하라. 그리고

아무리 핍박받아도 자신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라. <이나중 탁구부>의 기노시타 할머니처럼 철저하게 추해져라.

물론 눈부신 로맨스 그레이도 없지 않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등장하는 고집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노인들을 보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서 수우 가족을 돌봐주는 시즈 할머니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아무래도 더욱 그럴 듯한 노인은, <란마 1/2>이나 <메종일각>과

같은 다카하시 류미코의 만화에 나오는 괴팍하면서도 생기발랄의 개성을 마음껏 펼쳐내는 조역의 노인들이다. 그러고보니 노인을 가장 노인답게

그리는 데 다카하시를 따라올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