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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BIAF Daily > 제 24회(2022) > 2022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BIAF 4호 [인터뷰] ‘나는 말이다’ 임채린 감독, 전투하는 몸의 언어로
김소미 사진 백종헌 2022-10-24

BIAF 단편경쟁 <나는 말이다> 임채린 감독 인터뷰

<메이트> <아이즈 앤 혼즈>로 앞서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초청되었던 임채린 감독이 올해로 세 번째 부천을 찾았다. 그는 BIAF 뿐 아니라 프랑스 안시, 독일 라이프치히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일찌감치 알아본 단편 애니메이션계의 기대주다. 이번 신작 <나는 말이다>는 감독 자신과 여성 가족 구성원들의 태몽을 소개하며 그 안에 깃든 가부장적 편견을 감지하게 만든다. 무대에 서서 “그저 느껴주셨으면 한다”라고 관객에게 부탁한 임채린 감독의 논내러티브 영화 <나는 말이다>는 반인반호(호랑이), 반인반마(말)가 된 여성들의 치열한 몸짓 속에서 편향된 젠더 이미지의 전복을 꾀한다.

- 보통 아들로 해석되곤 하는 호랑이, 말 꿈을 꾸고 태어난 여성들의 존재를 실험적인 작품 속에 녹여냈다. 작업의 출발점은 무엇이었나.

= 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자녀 문제로 이혼했다. 외할머니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다. 엄마가 셋째 딸인데, 호랑이 태몽이어서 모두들 아들일 거라 기대했다고 한다. 그러다 셋째 아이까지 딸이 나오자 불화가 시작됐다. 나와 내 쌍둥이 자매의 태몽에 등장한 동물은 말이었는데, 나 역시 자라면서 말 태몽이나 말띠 여자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 같은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태몽이라는 미신의 진위를 떠나 우리 문화가 태몽을 해석하는 방식에 가부장제가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짚어내고 싶었다.

- <나는 말이다>는 반인반호(호랑이), 반인반마(말)로 표상된 여성의 몸짓을 이중섭 화가의 화풍을 차용해 담아냈다. 전작 <아이즈 앤 혼즈>에선 피카소의 판화 연작인 볼라르 스위트(vollard suttie)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어 반인반우(소)인 미노타우로스의 변신 과정에서 성별의 경계를 파괴했다. 남성 화가들의 권위와 남성중심적 화풍을 비트는 작업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나.

=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내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 수 있었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가부장제의 억압도 점점 더 선명하게 인지하게 됐다. 그런 의식이 작품 스타일에도 늘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던 것 같다. 이중섭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데 왜 이 세계에 여성은 없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더라. 어린 아이들까지 대체로 남자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여성은 모두 부인이라는 점이 이상했다. <아이즈 앤 혼즈>는 아버지와 크게 다퉜던 시기에 마침 학교에서 피카소의 동판화 시리즈 전시를 접하게 되면서 내 안에서 어떤 발화점이 생겨났다. 피카소는 자신을 힘센 미노타우르스로 묘사하면서 여성을 강간하는 이미지를 주저없이 선보였다. 제목도 레이프1, 레이프2 이런 식이다. 내 작업은 모종의 권력들에 대한 나의 응답이고 저항같은 것이었다.

- <나는 말이다>에서 말로 표현된 두 쌍둥이가 육체적으로 얽히고 설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 창과 방패처럼 싸우는 쌍둥이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팬데믹 기간에 달리 할 일도 없던 차에 넷플릭스에서 <마이클 조던: 더 라스트 댄스>를 본 적이 있다. 마이클 조던은 자신이 지금처럼 목표 의식이 뚜렷한 승부사 기질을 갖게 된 이유로 어린 시절의 영향을 꼽으면서, 남자 형제들끼리 거칠게 몸싸움하고 경쟁하며 자라는 과정을 묘사했다. 따져보면, 문학이나 대중문화에서 남자 형제들의 관계는 호전적으로 묘사되는 반면 여성 자매들의 이야기는 자주 미묘한 감정의 차원에서 그려진다. 서로를 이기고 싶은 마음, 경쟁 의식, 더 나아지기 위한 갈등처럼 생산적인 주제와 약간의 거리가 있달까. 어린 시절 나와 내 쌍둥이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서로의 능력에 자극받아서 경쟁하는 식으로 치열하게 다퉜다. <나는 말이다>의 반인반마 쌍둥이들에게서도 그런 호전성을 보고싶었다.

- 그동안 작업하면서 피카소나 이중섭의 권위를 건드린다는 점에 대한 주변의 섣부른 우려나 반대의 목소리를 마주한 적은 없었나.

= 목표에 정확히 접근하지 않으면 자칫 그들의 작품을 그냥 베끼는 데 그친 작품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많이 들었다. 어떤 교수님은 권위있는 화가의 스타일을 인용한 작품들이 이미 많다면서 레퍼런스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일에서 내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피카소를 재해석한 아시아 여성의 용감한 시도”라는 식으로 요약한 평론도 볼 수 있었는데, 그다지 기분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나의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정체성보다는 아시안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 자체가 백인 중심적이라 느꼈다.

-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대담하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 육체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매혹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점도 지난 단편들부터 지속되는 특징이다.

= 내가 느끼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묘사하려 할수록 섹슈얼리티를 더 드러내는 방향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게 된다. <나는 말이다>에서 젖꼭지를 물어뜯는 모습이나 죽은 줄 알았던 남자 위에 흰 천을 덮자 성기만 솟아오르는 모습 등을 묘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 알루미늄 호일을 이용해 석판화 스타일로 제작했다. 양담배를 싸던 은박에 드로잉을 했던 이중섭의 은지화가 떠올랐다.

= 이중섭 작가의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쪽이 은지화다. 석판화는 돌 자체가 비싸고 공방에 가야만 작업할 수 있지만 알루미늄 호일과 콜라를 이용하면 좀 더 접근 가능성을 높인 형태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그래서 ‘키친’ 석판화라고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단어 자체가 좋았고, 정통 석판화가 아닌 대안적 방식이라는 점도 끌렸다.

- 재료와 기법 면에 있어 작품마다 변화의 폭이 매우 크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 자기 작업을 지속한다는 건 곧 자기 복제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 자체를 자기만의 색깔로 확장하는 작가도 있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가 못하다. 반복과 답습에 민감하다고 할까. 너무 뻔한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 기법은 피하고 싶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길 즐긴다. 다양한 재료와 방식을 시도하다보면 결국 자주 망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망쳐버리는 과정에서 뜻밖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

- 단편 애니메이션 <메이트> <> <아이즈 앤 혼즈> 등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라이프치히 국제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영화제 등 유수의 해외 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한국인이지만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셈인데.

= 한국에서 시각디자인학과 학사를 마친 뒤 내가 움직임에 더 끌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 실험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미국 학교에서 크게 배운 건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홀로 생존하는 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제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석사 과정 중 작업한 3개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혼자 배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것이 중요했지만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엔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면서 일거리나 지원금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부끄러움을 꾹 참고 이메일 쓰는 법부터 배웠다. (웃음) 라이프치히 국제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만난 독일 프로듀서와 인연이 닿아 함께 작업할 수 있게 된 것도 내겐 좋은 전환점이었다.

- 여성영화 전문 스트리밍 플랫폼 퍼플레이에서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 컬렉션인 <그려서 만든 세상> 시리즈에 참여했다.

=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보니 교재나 레퍼런스로 소개되는 작품들이 늘 북미, 유럽 중심인 것이 아쉬웠다. 한국 작품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하루 날을 잡아서 한국 여성 감독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기획을 추진했다. 그 때 <움직임의 사전> 정다희 감독, <아홉살의 사루비아> 장나리 감독, <호랑이와 소> 김승희 감독, <존재의 집> 정유미 감독 등께 직접 연락을 드려서 작품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김승희 감독님이 퍼플레이의 <그려서 만든 세상>를 소개해주어 컬렉션을 열게 되었다.

- 세계적으로 한국 여성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서로 활발히 네트워킹하는 편인가.

= 서로의 마감을 감시해주는 온라인 채팅방이 있다. (웃음) 혼자 작업하다보면 고립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 각자 묵혀둔 슬픔이나 불만 같은 걸 토로하는 장을 만들기도 한다. 팬데믹 때문에 계속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쉬웠는데 이번에 BIAF에 와서 <버킷>을 만든 김보영 감독님과 직접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 계획인가.

= 작업 때문에 손목 인대가 파열되어 수술을 받았고 아직은 회복하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게 사실이다. 다음 작업은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으로 구상 중이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처럼 내러티브를 살리거나 인터뷰를 중심에 놓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화면의 이미지, 그리고 움직임을 중심으로 작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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