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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3호 [인터뷰] 평범해서 더 아름다운, 이웃 청년 태일이의 미소를 전하다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21-10-08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의 가장 큰 차이를 꼽는다면 <태일이>는 컬러라는 거다.”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홍준표 감독은 농담처럼 운을 뗐다. “영화가 전태일 열사 한 사람에 집중해서 내면으로 들어간다면 애니메이션 <태일이>는 전태일 이외 주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전체를 보여주는 영화다. 전태일 열사의 영향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 대단함을 모르진 않겠지만 그때의 전태일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에겐 거리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좀 더 보편적인 선택, 상식이 통하는 세상, 사람 사는 이야기로서의 전태일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다.” 전태일 열사를 왜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묻는다면 이보다 적절한 설명은 힘들 것이다.

전태일은 지금도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지금의 청년들도 애니메이션 속 태일이 같은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메시지와 공감. 의미와 재미. 첫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홍준표 감독의 비결을 들어봤다.

-첫 장편 애니메이션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모든 게 처음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 영화제에 초청된 것 모든 순간이 낯설고 어색하고 얼떨떨하다. 이 와중에 심지어 태일이 역에 목소리 출연을 한 장동윤 배우와 개막식 레드카펫까지 서게 됐다. 정신이 없지만 설레고 신기한 기분도 든다. 무엇보다 내 컴퓨터 안에만 있던 내용물을 공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여러 의미로 불안하고 무섭고 재밌고 기대된다. 한마디로 복잡하다. 단편 때보다 백배는 더 긴장된다. 지금 입은 움직이고 있지만 실은 제정신이 아니다.(웃음) 그동안 몇 번의 내부 시사가 있었고 반응과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백 마디 칭찬보다 한마디 아쉬움이 더 귀에 크게 남기 마련인지라 11월 개봉을 앞두고 현재 부지런히 마무리 작업 중이다.

-전태일 열사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어떤 계기로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수년 전부터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고 초기 기획과 파일럿이 간단하게 제작된 상태였다. 여러 이유로 프로젝트가 잠깐 중단되었다가 몇 년이 흐른 뒤 다시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갈 때 참여하게 되었다. 시나리오 상으로는 3고가 나온 시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나리오는 유지하되 기존의 캐릭터 디자인, 배경 아트웍을 전부 새롭게 작업했다. 당시 나는 <요일마다>(2017)라는 웹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제작 중이었는데, 3화가 나가는 시점 즈음에 그걸 보시고 나의 아트웍과 전태일 열사 애니메이션이 어울릴 것 같다며 연출 섭외가 들어왔다.

-이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이란 영화가 만들어진바 있고 애니메이션으로 다루기 쉬운 이야기도 아니다. 게다가 첫 장편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태일이>를 연출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

=정말 고민이 많았다. 겁도 났다. 장편이라서가 아니라 이 분의 이야기를 내가 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전태일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무게는 잠시 덜어내고 20대 초반 청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시대극으로 접근하면 그동안 내가 해왔던 톤의 작화를 통해 따뜻한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략 3개월 정도는 고민했다. 조금 웃기지만 개인적으로 인연처럼 다가온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창 고민을 하며 사무실 근처를 산책하던 중에 길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하나 주운 적이 있다. 펼쳐 봤더니 찢겨진 필기에 ‘전태일’ 세 글자가 적혀 있는 거였다. 주변에 이야기해도 아무도 믿어주질 않는다.(웃음)

-시나리오로 써도 너무 작위적이라고 지적받을 에피소드다.

=그러니까 말이다.(웃음) 초자연적인 현상까진 아니라도 일어난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 쪽지는 아직 보관하고 있다. 그렇게 다가왔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풀어도 될 것 같았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밝고 따뜻하고 몽환적이고 포근한 느낌의 작화 방향을 잡았다. 색감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초점과 분위기를 사람 전태일에 맞춰나갔다. 제목도 ‘전태일’이 아니라 ‘태일이’다. 한국에서 전태일은 하나의 고유명사에 가깝게 다가온다. 태일이라고 부르면 다른 접근이 가능할 것 같았다.

-실존인물을 다룬 전기영화일수록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마무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태일이의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한 따뜻한 기억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영화의 방향성을 설명해준다.

=오프닝과 엔딩은 초기 시나리오에선 구체적이지 않았다. 태일이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다루자는 콘셉트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최종적으로 태일이가 서울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어머니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잡았다. 죽음으로 인권을 외친 전태일 열사가 우리 곁에서 함께 숨 쉬는 건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존재 덕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가장 따뜻한 순간으로 그리고 싶었다. 엔딩은 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두 사람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결정됐다.

-소재도 예사롭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어려웠나.

=벽이 있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전제를 밝혀두겠다. 우선 첫 번째 어려움은 제작 경험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실력이 모자란다기보다는 팀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초반에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모으고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티스트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작업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썼다. 기존의 업계에서 사용하는 작업 툴이나 프로세스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세팅할 수 있었다는 점이 주효했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 트랜디한 툴을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최적의 방식을 찾아냈다. 한계를 장점으로 바꾼 사례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게 계속 시도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나가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기획 단계를 제외하고 프로덕션에서 미술과 배경 파트를 1년, 애니메이션 파트에만 1년 반 정도를 쉼 없이 달려왔다. 단순 계산을 하면 배경 파트만 1300컷 이상을 작업했다.

-배경이 매우 사실적이고 디테일하다. 당시 평화시장 등 실제 공간들에 대한 많은 자료조사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한 마디로 목숨을 걸었다. 과장 아니다.(웃음) 실제 있었던 공간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당시를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조금만 달라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시대와 사실 고증, 자료조사에 특별히 공을 들였다. 첫 번째는 틀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다음으로 관객들이 그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길 바랐다. 가령 벽에 포스터를 그린다고 해도 당시의 연도와 달, 계절에 쓰인 것을 찾아서 넣었다. 이렇게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있는 그대로를 복원하고자 했다.

-반면 캐릭터 작화는 최대한 심플하게 가져가려고 했던 것처럼 보인다.

=캐릭터 디자인의 변천이 크게 세 차례 정도 있었다. 처음에는 기존의 디자인들을 옮겨와 내 스타일로 바뀌어보았다. 그러다보니 작화만 바뀌었고 인물의 특징이 제대로 반영이 안 된 것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는 실존 인물들의 모습에서 따와 캐리커쳐에 가깝게 접근했다. 이번엔 캐릭터는 선명해졌는데 반면 캐릭터의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큰 액션이나 움직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표정연기 등 디테일한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표정연기를 잘 할 수 있는 얼굴로 변경이 필요해 지금의 디자인이 결정되었다. 태일이를 최대한 친숙한 이웃처럼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공교롭게도 이후에 목소리 연기로 캐스팅 된 장동윤 배우와 닮기도 했다.(웃음)

-태일이 역의 장동윤, 이소선 여사 역의 염혜란, 아버지 역에 진선규 외에도 재단사 신씨역에 박철민, 권해효 등 여러 배우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성우들의 전문 연기도 좋아한다. 다만 이번 영화에선 생활감이 묻어나는 톤이 필요했다. 자유로운 연기를 먼저 하고 거기에 일정 부분 그림을 맞춰나가는 프로세스로 작업했다. 쉽지 않은 역할인데 다들 흔쾌히 참여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진선규 배우의 경우 음악극 <태일>에서 태일이 역할을 하시기도 했고, 박철민 배우는 영화에서도 재단사 신씨 역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불타고 있는 태일이를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클라이맥스 연출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막상 하고 보니 그 순간을 위해 이야기를 끌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거리를 띄우는 게 전체 톤에 어울릴 거라 판단했다. 태일이 몸을 감싸는 불도 일부러 사실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처리함으로서 태일이의 의지와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11월 개봉이다.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단순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 영화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전부다. 작업을 하면서 함께 작업하는 아티스트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자연스런 생각을 자주 했다. 원래 애니메이션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힘든 순간이 닥칠 때마다 ‘태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했다. 태일이도 그랬겠지만 이번 작업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많이 얻었다.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는 모든 분들게 감사한다. 이제 다음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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