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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5호 [인터뷰] '만인의 연인' 한인미 감독, “왜 10대의 성욕은 발화되지 않을까?”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1-10-10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초청작 <만인의 연인> 한인미 감독 인터뷰

엄마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딸은 두명의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18살 유진은 사랑에 목숨거는 엄마가 미운데, 가만히 살펴보면 사랑 때문에 괴로운 건 자신도 매 한가지다. 그 흔한 교실 장면 하나 없는 성장담 <만인의 연인>은 학교 바깥을 소요하는 주인공이 관계 속에서 겪는 상처와 비극을 적나라하게 바라본다. 대학생 오빠 강우에게 어른처럼 보이고 싶고 동갑내기 현욱의 순애보도 즐기고 싶은 유진의 당돌한 연애사 아래에는 억눌린 불안과 두려움, 욕망과 조급함이 세차게 관류한다. 단편영화 <토끼의 뿔>(2015)로 전주국제영화제 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던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한인미 감독이 4년 동안 집요하게 붙든 데뷔작 <만인의 연인>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위태롭고 각자의 고독과 혼란에 처해있지만, 두 모녀가 관객 앞에서 자기 고난을 내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눈길이 갔다.

=성장기에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지낸 기간이 굉장히 짧다. 전학을 자주 다녔고, 엄마랑 살다가 아빠랑 살다가 계속 옮겨 다녔다. 온 가족이 돈독히 협력해서 가정을 꾸려나가지 않는 상황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였고 그게 기본값이었다. 어떤 문제든 그게 자기 삶의 문제가 되면 그것의 이상함이나 심각성을 잘 느낄 수 없게 될 때도 있지 않나. 그런 감각이 반영된 것 같다.

-동시대 같기도 하고 기억 속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시대 배경, 그리고 공간 설정은 어떻게 정했나.

=처음에는 배경을 경상북도 소도시, 영천 정도로 설정했다. 사투리를 쓰는 지역에서 주인공이 서울말을 쓰는 이방인으로 존재해야 했다. 유진이 스마트폰으로 카톡 메시지를 보내는 등 소품이나 간판 등 표면적으로 보이는 장치는 모두 2020년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아무리 세태가 달라져도 그 나이대에 겪고 통과하게 되는 감정들에는 공통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10대 시절에 대한 나의 기억, 그리고 감정들이 영화에 섞여 있어서 아마도 더 옛날 같은 느낌이 묻어나는 것 아닐까 싶다.

-유진의 엄마 역에 서영희 배우를 캐스팅했다. 최근 장르영화에서 자주 호출되었던 배우였기에 반가운 쓰임이었다.

=서영희 선배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셨다. 어떤 엄마이길래 아이를 두고서 자기 사랑을 찾아갈까, 하는 의문을 소화해 줄 사람이 필요했달까. 지난 출연작들을 보면서 서영희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 마다 남다른 집중력이 생성된다고 느꼈다. 그동안 장르적으로 센 역할들을 많이 한 배우인만큼 내 영화에서 일상적인 모습을 연기할 때 또 어떤 새로운 모습일지 보고싶었다. 처음 만난 날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10대 시절에 씩씩하게 알바도 많이 하고 사랑도 재밌게 하셨던 것 같더라. (웃음) 그게 꼭 유진같아서 유진의 엄마 역으로 캐스팅해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기발하면서도 납득가는 이유다. 유진을 연기한 황보운 배우와는 어떻게 만났나. 첫 주연작을 맡은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담성 있고 단단한 장악력을 보여준다.

=캐스팅하기가 참 어려웠다. 황보운 배우는 신인 배우들의 프로필을 모으던 중 1순위로 직접 만나보고 싶었던 배우다. 배우 자신이 인물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점이 미더웠는데 처음엔 연기 경력이 없어서 걱정스럽기도 했다. 나 또한 이제 막 장편 데뷔하는 신인 감독이니까 배우만큼은 좀 더 안정적인 경험을 갖춘 사람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다른 후보들을 여럿 만나면서 오히려 확신이 섰다. 기술적으로 연기를 정말 잘하고 캐릭터 분석을 뛰어나게 하는 배우들도 많았지만 노련한 배우가 유진을 연기하는 순간 이 영화는 아예 성립하지 않을 거란 깨달음이 든 거다. 무언가를 모르는 상태, 혼란과 순수를 연기해야 하는데 이미 그런 감각을 너무 잘 아는 배우에게선 내가 원하는 지점을 건질 수 없었다. 유진 배우는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또 긍정적인 사람이다.

-열여덟 유진은 정말 매력적인 여성 주인공이다. 영화 초반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에게 야무지게 항의하는 장면을 보면서 기꺼이 이 캐릭터를 따라 이야기의 여정에 동행하고 싶어졌다. 나이답게 일면 미숙할지언정 절대로 함부로 자신을 파괴하거나 어리석음을 자처하지 않더라. 창작자가 인물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10대 시절엔 사회적인 압박과 주변의 눈치로 인해 많이 억눌리게 된다. 나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작품 속 인물이 해보길 바란다. 원하는 것을 찾고 솔직하게 욕망을 따르다가 실수도 하고 깨져보기도 하고 다 해봤으면 좋겠다.

-10대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주도적으로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다. 피잣집 사장님과 동네 언니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유진이 느끼는 갈망, 좋아하는 상대를 유혹하려 적극적으로 애쓰는 모습 같은 것들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10대도 여자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볼 때 항상 갈증이 느껴졌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과 너무 다르게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성욕을 가진 10대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는 나오면 안되는 그런 분위기인 것만 같고. 대상화되지 않은 미성년의 욕망을 그려내는 것이 목표였다. 자주 가시화될수록 공감의 기회도 생기는 거니까.

-서정적인 성장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은 굉장히 적나라한 영화다. 태연한 얼굴로 인생의 잔혹하고 비극적인 면을 펼쳐보인다. 은근히 대담한 기질의 소유자같다. 단편영화 <마침내 날이 샌다>(2013)부터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감각이다.

=그런 게 없으면 이야기가 재미없게 느껴진다. 본능이고 성향인 것 같다. (웃음) 사건이 분명 일어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설명은 안되는 그런 순간들을 좋아한다. 관련된 사람들을 붙잡고 아무리 물어봐도 진실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지 않나. 살다가 경험한 그런 순간들이 내 몸 안을 돌아다니다가 작품을 쓸 때 불쑥 밖으로 나온다.

-발표한 지난 단편영화들 모두 미성년인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니 20대 이후로 쭉 영화계에 몸담아 온 셈인데, 과거에는 여성 감독이 성장담을 그리는 작업을 사소하거나 사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장르적인 접근을 요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해 온 선택 자체가 일종의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엔 그저 내게 재밌는 이야기를 쓴 것일 뿐이었고 내 관심사나 성향에 대해 의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면서 그런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교육기관으로서 재학생들이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상업적인 감각까지 기르길 바라니까, 조금 더 다른 시도를 해보라는 시선을 느끼긴 했다. 특히 장편 데뷔작으로 <만인의 연인>을 준비할 때 ‘왜 계속 같은 걸 해? 아이들 이야기 말고 다른 것도 해 봐’하는 반응들이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라든지 ‘네가 만들어 온 세계관이 궁금하고 계속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내게 힘을 줬다. 길을 잃을 때쯤 꼭 한 사람람씩 나타났다고 해야하나. (웃음) 장편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꼭 완성된 영화로 보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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