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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영화'에서 카리스마의 형식으로서 영화를 생각하다

영화였던 것, 영화인 것, 영화가 되는 것

[김소희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의 영화에 관해 쓰면서 이런 경고 문구를 넣어야 하나 고민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화관의 관객이 백지상태의 얼얼함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믿기 어렵겠지만, <소설가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끝을 맺는 반전(反轉) 영화다. 이때 반전이란 서사의 비밀을 뒤늦게 노출하는 방식에 관한 것일 리는 없다. 반전은 영화의 구조에서 온다고 정리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영화는 구조 자체가 두드러지기보다 마지막에 이르러 구조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퇴로가 보이지 않는 영화라는 구조다. 반전은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가 곧 반전이다. 구조를 만든 것은 두번의 크레딧이다. 크레딧은 잠깐의 사이를 두고 두번 이어진다. 크레딧이 두번 혹은 그 이상 흐른대도 이상한 건 아니다. 옴니버스영화의 경우 개별 영화가 끝날 때마다 크레딧이 흐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크레딧을 통해 영화 내부에 분절을 표시한 적이 있다. <옥희의 영화>(2010)는 4개의 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각각의 시작 부분에 출연배우의 이름을 비추는 크레딧이 나온다. 반면 동일한 크레딧이 두번 흐르는 것은 이상하다.

알리바이는 있다. 두개의 크레딧 사이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길수(김민희)의 모습이 등장한다. 첫 번째 크레딧을, 길수를 주인공으로 만든 준희(이혜영)의 영화에만 한정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크레딧에 캐릭터의 이름이 아닌 실제 배우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상하다. 더군다나 상영된 영상에서 길수 외에 다른 인물들은 보이지 않으며, 그들이 참여한 영화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크레딧은 처음에 인식한 그대로 이질적 부분을 포함한 전체 덩어리에 관한 크레딧으로 봐야 한다. 영화의 제목이 ‘준희의 영화’가 아닌 ‘소설가의 영화’인 것도 영화 속 영화를 캐릭터의 영화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제어한다. 영화가 끝나는 시간까지 정확히 계산해 극장 앞에 와 있으려던 준희와 경우(하성국)가 지척에 있음에도 제때 나타나지 않은 것도 영화 속 영화와 이들이 인식하는 영화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사이 영상의 존재

크레딧이 끝나고 길수가 다시 등장할 때, 그 부분의 성격을 영화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상의 위치가 곧 영상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크레딧 이후의 영상은 일종의 쿠키 영상일 수 있다.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쿠키 영상은 길고 긴 크레딧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다음 시리즈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홍상수 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인식되며, 몇명의 배우가 그의 영화에 반복해서 출연한다는 점에서 시리즈영화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그것만으로 시리즈영화라고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단지 크레딧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쿠키 영상에 관한 전복적 사유 가능성을 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장면이 주는 놀라움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되진 못한다. 길수는 크레딧 이후 벌컥 문을 열고 나와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관객에게 직접 알린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영화의 문이 갑자기 열린 적이 있다. <극장전>(2005)은 <소설가의 영화>와는 반대로 영화 속 영화로 시작된다. 다만 그것이 영화 속 영화라는 사실은 극중 주인공이었던 배우 최영실(엄지원)이 영화관 문을 벌컥 열고 극장을 빠져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표면상으로는 픽션의 세계에서 실제의 세계로 이동한 것 같지만,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처음의 혼란한 상태 그대로 두개의 세계가 명확히 분리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문이 열리는 방향은 그 반대다. 배우가 문을 여는 순간 실제 그대로의 모습에 가까운 홈 비디오의 세계에서 다시 픽션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이를 픽션의 세계로의 진입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배우의 동작이 극장 관객이 마주한 실제 상황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배우는 관객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끝에 놓여 있다. 배우의 동작은 실제에서 다른 실제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혹은 관객이 놓인 실제의 세계를 픽션의 세계 안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 크레딧이 오르고 불이 모두 켜진 상태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됐을 때, 막 일어나려던 관객은 동작을 멈추고 영화관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영화는 마치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처럼 깨어나려는 소음을 일순에 잠재운다. 침묵은 이제까지 내가 있던 자리가 카리스마의 형식 안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카리스마를 발휘한 것은 배우가 아니라 극장 상영 환경이다. 극장의 상영 환경을 통해 영화가 행한 것을 침묵이라 정리할 때, 수어를 배우는 초반 장면에서 준희가 행한 것은 극장이라는 환경에 대한 반영이자 정의일 수 있다. 현우(박미소)가 수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된 준희는 몇 문장을 읊고는 이를 수어로 표현해줄 수 있냐고 묻는다. 현우는 준희의 말을 수어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율동처럼 단어를 그대로 동작화한 것에 가깝다. 준희는 수어의 의미를 물어가면서 동작을 따라 하고 배운다. 그러고는 ‘우리 이제 안 들리는 거야’라며 소리내지 않도록 상황을 통제한 뒤 수어를 한다. 현우가 잘한다며 박수를 치자, 준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손가락을 다시 입에 가져다 댄 뒤 다시 한번 침묵 속에서 수어를 한다. 준희가 상황을 통제하며 수어를 할 때의 모습이, 후에 ‘아깝다’는 말의 의미를 파고들며 자기 생각을 밝힐 때보다 카리스마 있다. 카리스마는 말이 아닌 침묵에서도 온다. 배우가 보여준 침묵의 힘은 인물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무성영화 시기 극장이 지닌 카리스마를 어렴풋이 되살린다.

지금 막 영화관 문을 연 배우가 영화를 품은 공간에 관한 사유를 연다면, 영화 속 영화는 영화의 존재에 관해 상상하게 한다. 영화 속 영화에서 야외 공원에서 손에 들꽃을 든 배우 김민희(여기서는 배역보다는 실제 배우의 삶의 일면으로 보인다)가 입으로 <결혼행진곡>을 흥얼거리며 꽃을 장식할 마른 나뭇잎을 모은다. 배우는 이따금 카메라를 든 사람을 의식하며 미소를 짓고 말을 건넨다. 이들은 작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 같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실제 관계가 드러난 홈 비디오다. 김민희가 카메라와(그리고 카메라 뒤의 사람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눈다. 김민희는 들꽃을 장식할 나뭇잎을 줍고 있다. 그 옆에는 실제 가족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동행한다. 당황스러울 만큼 노골적인 실제의 출연이다.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지, 어떻게든 이것을 영화라고 믿을지 갈등하는 도중 그때까지 내내 흑백으로 진행되던 영화가 컬러로 바뀐다.

컬러의 이유

흑백에서 컬러로 이동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 거기에 특정한 의미가 있다고 해석되어왔다. 간단히 말해 흑백은 과거 혹은 회상의 자리에, 컬러는 현재의 자리에 놓인다. 물론 <하하하>(2010)에서 홍상수는 흑백과 컬러가 놓인 시간의 자리를 의도적으로 서로 교환했다. 여기에서 컬러로의 이동은 나뭇잎의 실제 색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흑백과 컬러 안에서 나뭇잎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같은 숏과 상황 안에서 컬러로 이동하면서 흑백과 컬러를 둘러싼 상투적 분류를 거절한다. 나아가 색이 추가되는 동시에 음향은 소거된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하는 김민희의 입은 보이지만, 말은 들리지 않는다. 흑백과 컬러의 이동과 함께 말의 도래라는 첨가의 시대를 역행하며 영화는 무언가 더하면 무언가를 빼야 한다고 말한다. 라브 디아스는 디지털 장비가 보편화되고 영화를 찍는 것이 쉬워지면서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일부러 어려움을 만든다고 한 적이 있다. 홍상수가 보여준 컬러와 음향의 교차 역시 어려움의 요소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영화는 외따로 떨어진 것 같지만, 영화 속 장면들과 소통한다. 준희와 길수가 마주 보고 식사하던 분식집 장면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배경이다. 창문 너머 실제 거리의 풍경은 화질이 좋지 않아 거의 점묘화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이따금 창밖 풍경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카메라 위에 드러나지 않는다. 식당 맞은편에는 초등학교가 있지만, 화면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촬영 장비의 열악함이나 촬영자의 서투름이 아니라 하나의 의도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어떤 것을 선명히 보여주지 않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선명히 보지 않기가 힘들다. 심도가 얕아 포커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부분은 부드럽게 처리되며, 울퉁불퉁한 질감을 노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 문득 창문 바깥에 나타난 한 아이(김시하)가 창문 가까이에 얼굴을 붙인 채 안쪽을 본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창문은 기억을 촉발하는 매개이거나 소통할 수 없는 세계이거나 거리감을 강화하는 장치였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에서 문호(유지태)와 헌준(김태우)은 혼자 남겨졌을 때 창문을 통해 맞은편 도로에서 차를 기다리는 검은 코트의 여자를 본다. 그 여자는 두 사람이 식사할 때 식당을 나간 여자다. 두 사람은 각자 여자와 눈을 맞추지만, 곧 여자는 사라지고 이들은 선화(성현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검은 옷 남자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내부 인물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완전한 가상이자, 실재였다. <강변호텔>(2018)에서 시인 영환(기주봉)과 그의 두 아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만나지 못한다. 영환이 창밖에서 아름(김민희), 연주(송선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도 두 아들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이들을 보지 못한다. 마침내 창을 통해 서로 만나게 되는데, 창밖의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지만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설상가상 옆에 난 문이 잠겨 있어 이들의 만남을 훨씬 어려운 것으로 느끼게 한다. 창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영겁의 창, 혹은 가까이 있어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막 같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은 연극을 떠올렸을 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홍상수는 <극장전>(2005)에서 실제 연극 장면을 삽입한 적이 있다. 카메라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좌우로 이동하며 공연 장면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숏을 나누지 않고 카메라의 방향을 돌려 객석의 사람들과 상원(이기우)을 잡는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가상의 벽을 상상하는 연극 공연에서 실제로 배우와 관객 사이가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자연스러운 연극의 관행이 기이한 것으로 돌출한다. 이 장면은 필연적으로 영화 관람 경험에 관한 생각을 촉발한다. 영화관 역시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있다. 다만 영화는 연극과 같은 실시간의 경험이 아니며, 배우들의 연기와 소품, 무대장치 등으로 채워진 연극 무대에 스크린이라는 얇은 막 하나가 달랑 놓일 뿐이다. 막을 통해 깊이의 환영을 만든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한데 <극장전>에서 주목하는 영화의 특징은 배우의 분신 가능성이다. 연극을 하는 배우가 실시간으로 자신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영화는 가능하다. 이제는 분신하는 배우에 관한 영화의 관심은 줄었다. 대신 영화를 상기시키는 막 자체로 관심이 옮겨간 경향을 보인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난 아이는 창문 안의 인물과 눈이 마주치자 사라졌다가 얼마 뒤 다시 나타난다. 인사를 건네면서 밖으로 나가는 길수의 모습은 창문을 사이에 둔 소통의 벽을 보여준 작품들과 비교하면 산뜻한 해소처럼 느껴진다. 길수와 아이는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는 어딘가로 나란히 걸어가며 사라지지만, 이것이 불길하지는 않다. 아이와 길수의 창을 넘나든 소통은 영화 속 영화에서 보여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소통하는 배우와 카메라를 든 감독의 모습의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창문 밖의 소거된 목소리는 컬러 화면에서 소거된 음성과 맞물린다. 감독의 영화를 축약한 몸짓으로 배우는 영화가 만들어지기에 앞서 영화 속에 들어간 것 같다. 연출이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예고된 세계로부터 탈출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배우가 정해지면 거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는 준희의 연출론을 실행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최후의 영화

길수와 아이의 친밀한 소통과는 달리 극장을 둘러싼 배우와 관객 사이의 일치된 움직임을 통한 소통은 다정하기보다는 일견 서늘한 진단처럼 여겨진다. 홍상수의 작품에 영화관이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실제를 반영하듯 영화 속 관객의 수도 점점 줄었으나 그래도 관객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그러나 <소설가의 영화>에선 극장 어디에도 관객을 찾을 수 없다. 길수는 혼자서 영화를 본다. 극장 직원을 포함해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만 극장에 있다. 관객의 완전한 삭제다. 섬뜩한 것은 관객이 없는 영화관이 별다른 주의를 끌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위기에 관해 논할 때, 논의의 중심이 되는 것은 늘 관객이다. 극장의 위기는 곧 관객수의 감소이며, 논의는 어떻게 하면 관객을 끌어올 수 있을까가 중심이 된다. 반면 쿠키 영상처럼 덧붙은, 그러나 영화의 핵심에 가까운 마지막 숏은 극장의 힘을 실감하게 하는 동시에 극장이 더는 관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상상해보게 된다. 마지막 숏에서 길수와 프로그래머가 각자의 문 속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하얗게 빛나는 스크린으로서의 벽이다. 그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영사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의 끝인가. 혹은 영화의 종말이나 멸종인가.

<소설가의 영화>의 흑백 영상은 우리에게 하얗게 빛나는 밝은 스크린들을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다. 극장의 벽면에서도 하얗게 날아간 풍경 위에서도 스크린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스크린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흰 스크린은 배우들이 쓰고 나온 마스크 위에도 발견된다. 동시대의 팬데믹 상황을 반영한 배우들의 마스크가 스크린이라면 스크린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를 삼킨 실제 위기의 징후일 수 있다.

영화는 마치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것을 자신의 내부에 그러모으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 영화에 관해 남겨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영화에 관해 토론하는 술자리는 그의 영화 속에서 어느 순간 사라진 관객과의 대화이자, 인터뷰이자, 뒤풀이 자리를 채운다. 끝부분에 위치한 영화 속 영화는 준희가 지나온 배움의 결과물이 아니라 배움을 촉발한 시작점에 놓아볼 수도 있다. 준희의 여정은 영화가 사라진 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을 발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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