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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천우희 "사회가 개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화두를 던지고 싶다"
임수연 사진 백종헌 2022-04-28

천우희에게는 카메라 앞에서만 발동하는 예민한 촉수가 있다. 불시의 틈입을 감지하면 순간적으로 증폭하는 감정은 관객이 천우희의 얼굴을 기억케 하는 연료가 됐다. <앵커>의 정지연 감독 역시 천우희에게서 “예민하기도 명민하기도 한 느낌”을 발견했다. 9시 메인 뉴스를 진행하는 9년차 베테랑 아나운서 세라(천우희)는 자신이 기자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발로 뛰는 취재를 갈망하는 동시에 그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여성 후배 기자를 의식하던 세라는 ‘모녀 사망 사건’에 휘말리면서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힌 환상을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주로 내추럴한 이미지를 선보였던 천우희가 빈틈 없이 완벽한 앵커의 룩을 입었을 때, 미세한 뒤틀림까지 잡아내는 천우희의 감각이 유리 천장과 경력 단절의 공포를 조우했을 때 새로운 스릴러의 결이 만들어진다.

- 진짜 앵커처럼 보여야 하는 작품인 만큼 아나운싱에 대한 기술적인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배우들의 발성, 발음 훈련과는 어떻게 달랐나.

= 원래 모사를 잘했다. <우상> 때도 연변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에게 “중국에 진출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웃음)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포인트를 잘 잡아 표현하면 모사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현장에서 김민정 아나운서가 상주하면서 아나운싱 연기를 도와줬는데, 내가 아무리 연습을 열심히 해도 아나운서가 직접 보여주는 시범을 보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연기를 못하겠더라. (웃음) 최대한 그들과 비슷한 색깔을 내려고 해도 아나운서들이 몇년 동안 쌓아온 경력은 한번에 따라 할 수 없다. 이건 ‘솔’ 톤으로 음을 낸다, 입 안에 동굴을 만든다고 나올 수 있는 발성이 아니다. 배우들은 발성 연습을 하더라도 자기 목소리의 개성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한 데 반해 아나운싱은 신뢰감을 주는 안정적인 톤을 잡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런 차이가 있었다.

- 실제 변호사가 말하는 방식과 변호사 연기를 리얼하게 하는 것은 다르다. 실제 앵커와 관객이 앵커라고 믿게 만드는 연기는 또 다를 것 같은데.

= 아나운서들이 평소 대화할 때는 뉴스의 발성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내가 앵커로서 먼저 각인이 되어야 작품 자체의 몰입도가 생기기 때문에 첫 장면부터 FM으로 갔다. 요즘은 뉴스에서 아나운서들의 화장이나 발성이 굉장히 내추럴한 경향이 있다. 그런 현실을 가져와 영화에 대입한다 한들 그것이 곧 영화적으로 잘된 표현이라고 보장할 순 없다. 그래서 조금 올드해 보일 수 있는 요소까지 가져와서 최대한 정석으로 발성과 의상, 표정을 표현하자고 감독님과 함께 설정했다.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은 대사 톤이나 발성을 매우 자연스럽게 했다. 때문에 전작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평소의 대화법까지도 명확한 딕션을 구사해야 세라의 캐릭터를 잘 살릴 수 있었다. 내면은 연약하고 불안하지만 오히려 이를 당당함으로 감추기 위해 더 딱딱하게 연기했다.

- 지금까지 실제 나이보다 더 어린 역할을 주로 연기했는데, 이번 작품에선 비슷한 연령대를 연기했다.

= 그런 말이 있다. 연기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나이는 실제보다 6~7살 아래의 캐릭터라고. 그만큼 경험이 있고 과거로부터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래 나이대의 캐릭터를 연기해보니 동시대에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발견하는 게 가능하더라. 그동안 선배 배우들과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회 초년생처럼 현장에 임했고 그게 초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들이 계속 쌓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세라를 연기할 때도 유사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의 경험치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자신과 함께 갔다.

- 실제 아나운서들의 세계에 대해 잘 몰라도, 결혼으로 인한 경력 단절을 겪어보지 않았어도 여성 관객이라면 이입해서 볼 수밖에 없다.

= 20대부터 40대 혹은 그 이상의 연령대까지, 결혼을 한 사람이나 하지 않은 사람도 본인의 상황에 대입해볼 여지가 많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많이 공감했다. 감독님이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엄마가 되고 싶은 본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싶다고 했는데 그 말에 너무 공감이 갔다. 임신과 출산, 육아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공포를 여자라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연기할 때는 개인적 감상을 집어넣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여자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 아나운싱을 할 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전달해야 하지만, 세라 개인으로서는 감정의 굴곡이 매우 크다.

= 앵커라는 직업 자체가 받는 규제가 굉장히 많다. 정확한 규격 안에 명확한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 예전에는 자유롭게 몸을 쓰면서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앵커>의 연기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영화적으로 감정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한신 한신 찍을 때마다 혹시나 놓치고 가는 부분이 없는지 감독님과 꼼꼼하게 체크를 하며 작업했다. <앵커>는 유난히 한컷 한컷 싸우면서 만들어간 작품이다.

- 더 다양한 여성 서사와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 실재하는 인물과 감정이 있는데 그만큼 대중매체에서 재현되지 않는 아쉬움이 반영된 결과다. <앵커>가 묘사한, 그간 희소하게 다뤄졌던 여성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나.

= 사실 인간은 다 똑같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 복잡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데 여성 캐릭터를 단일하고 평면적으로 그리는 게 아쉽기도 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 선보이면 그게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얼마나 재미있겠나. 여성 서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지만 작품 선택에 있어 1순위의 기준은 아닌데, <앵커> 역시 여성 서사라서 선택한 게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앵커>의 캐릭터들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일반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특히 한국에서는 여자가 욕망을 드러내면 기가 세고 나쁜 것이고, 욕망을 감춰야 착하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이에 대한 저항감도 확실히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야망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 면에서 <앵커>가 차별화된 작품으로 다가왔다.

- 몇년 전 이혜영 배우가 연기했던 연극 <메디아>를 조기 예매해서 보러 갔다는 인터뷰를 봤다. 존경하던 선배를 현장에서 만나니 어떻던가.

= 사실 한석규 선배님(<우상>)도 설경구 선배님(<우상>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 그분들과 연기를 하지?’ 싶었는데 막상 만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존경하는 분들이지만 연기할 땐 어렵거나 불편한 존재가 전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게끔 대해주는 좋은 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혜영 선배님과도 현장에서 그냥 엄마와 딸로 연기했다. 그런데 최근에 <당신얼굴 앞에서>를 볼 때는 다시 팬심으로 보게 되더라. (웃음) 선배님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존재하기만 해도 이야기가 된다. 물론 배우에겐 연기력도 딕션도 몸 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큰 재능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배우가 이혜영 선배님이 아닐까 싶다. 정말 한국 최고다.

- 신하균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

= 예전부터 진짜 좋은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계속 농담으로 “선배님은 연기 기계 같다”는 말을 한다. (웃음) 현장에서 같이 웃고 떠들다가 감독님이 연기를 해야 한다고 하면 바로 몰입한다. 감독님이 다른 디렉션을 주면 또 술술 해낸다. 그런데 이런 것이 가능한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고 연기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감독님의 디렉션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선배님의 내공을 느꼈다.

- <써니> <한공주> <곡성>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센 영화,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주로 도전적으로 선택한다는 이미지가 한동안 있지 않았나. 물론 이후 드라마 <멜로가 체질>, 영화 <어느 날>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출연하면서 고정관념이 거의 깨진 듯하지만 말이다. <앵커>에서 내재된 트라우마와 욕망과 광기를 보여주는 세라는 이전의 강렬한 캐릭터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

= 내가 보는 포인트와 관객이 보는, 혹은 표현되는 포인트가 좀 다른 것 같다. <써니>나 <우상>이나 <앵커>의 캐릭터들이 강렬하게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안의 유약하고 처연한 면을 집중적으로 봤다.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다. 특히 사회가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싶다. 앞으로는 좀더 다양한 인물들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당신과 함께 작업하는 감독들은 하나같이 “천우희의 새로운 얼굴을 꺼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천우희는 무엇이고, 새로운 면은 무엇일까.

= 그래서 맨날 “어떻게 찾아줄 거냐”고 내쪽에서 묻는다. (웃음) 음, 감독들이 내게 갖는 열망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이 배우가 가진 에너지로 다른 표현을 하는 모습을 발견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거다.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냥 나다. 그냥 내가 가진 목소리와 몸을 갖고 연기를 하는데 연출자가 어떻게 담아내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연출자의 시각이 중요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어쨌든 배우는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잘 활용되고 싶다.

- <마더> <써니> <한공주> <곡성>에서의 임팩트 때문일까. 천우희 하면 연기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크고 오디션을 200번쯤 보고 발굴됐을 것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치열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배우 지망생 시절에 자신의 재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 연기를 너무 하고 싶다는, 배우가 반드시 되어야겠다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 따라 연극반에 가입했다가 우연치 않게 대회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그래서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고 오해를 했다. (웃음)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는데 집안에서 별다른 피드백이 오지 않아서 성취감도 재미도 없었다. 그러다 한달 동안 준비한 무대를 선보이기 직전의 긴장감, 설렘, 여기에 어떤 보상까지 있으니 인생에서 처음으로 재미를 느낀 거다. 요즘 친구들은 오디션 정보가 올라오는 사이트에서 소식도 빨리 얻는 것 같은데 과거의 나는 그런 것에 밝지 않았다. 그냥 연기가 재밌으니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큰 게 아니었다. 만약 내가 어떤 목표치를 설정했다면 금방 좌절하고 연기를 오래하지 못했을 텐데, 오히려 기준점 없이 방황하는 듯한 느낌이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지금은 연기가 인생의 전부가 되고 간절하고 소중한 일이 됐다.

- <앵커>의 세라와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자리 잡는 거네.

= 세라는 롤플레잉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자란 인물이다. 엄마의 아바타가 되어 엄마가 짠 스케줄대로 미션을 수행한 다음에 마지막 엔딩으로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나는 부모님이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라는 쪽이었고, 정작 스스로는 경험이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었다.

- 지난해 가장 재미있게 본 콘텐츠 중 <환승연애>가 있었다고.

= ‘과몰입’해서 매주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 극영화보다 더 슬프다고, <환승연애>에서 연기를 더 배울 수 있다고 하면서. (웃음) 왜냐하면 이건 허구가 이길 수 없는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영화적인 감각이 훨씬 극적으로 좋은 감정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리얼함이 주는 진심은 배우가 표현할 수 없다. <환승연애>를 보고 보현이에게 과몰입하면서도 “아, 저걸 연기적으로 써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러닝타임이 꽤 긴 데도 스킵 없이 전 회차를 다 봤는데, 역시 3인 이상이 모이면 이야기는 만들어진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웃음)

- 티빙 오리지널 <전체관람가+: 숏버스터>를 통해 공개될 <부스럭>은 <아르곤>으로 인연을 맺은 조현철 그리고 이태안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다. 이옥섭, 구교환과는 <걸스 온 탑> <메기>를 함께 작업했다. 개성으로 팬덤을 모아왔던 독립영화계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에 적극적이다.

= 굳이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지만, 상업영화는 내게 원하는 것이 명확하게 있기 때문에 도전 정신과 실험 정신을 투철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아주 작은 프로젝트라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신선한 작품을 최대한 많이 해보고 싶다.

- <부스럭> 외에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개봉을 앞두고 있고,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촬영을 마쳤다.

= <부스럭>은 영화를 본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영화가 끝난 후 각자의 사유를 공유하며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원작 연극을 워낙 좋아했었다. 낭독 공연이 매우 기억에 오래 남아서 연극 무대까지 관람했다. 연극이 굉장히 냉정하고 드라이했다면 영화화되면서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녹아들게 됐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는 주체적인 여성이 현명한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현실감도 있고 장르적으로 보는 재미도 있다. 세 작품 모두 결이 다른데 관객이 이 영화들을 빨리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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