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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묻지마 패밀리
2002-05-28

시사실/묻지마 패밀리

■ Story

세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영화. 80년대 초반, 중학생 명진은 나이키 운동화를 사 신는 게 꿈이다. 그 꿈이 너무 절절해서 밤에 뜬 초승달도, 낮 하늘의 조각구름도 모두 나이키 상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택시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네 남매와 함께 달동네에 사는 명진이 비싼 나이키를 사기란 힘들다.(‘내 나이키’) 별 세개쯤 되는 중급 호텔의 같은 층에 잠든 애인을 불태워 죽이려는 남자, 킬러를 피해 숨은 조직폭력배, 그 조직폭력배의 두목을 죽이려는 킬러, 젊은 남자와 바람난 유부녀 등 네쌍의 인간들이 투숙한다. 이들의 사연이 우연히 얽히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사방에적’) 청소년 때부터 교회에서 누나, 동생하며 지냈던 남녀의 이야기. 여자가 결혼하자 남자는 군에 갔고, 남자가 휴가나와 둘이 만난다. 뭔가 서로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못하고 자꾸 시간만 간다.(‘교회누나’)

■ Review <묻지마 패밀리>라는 제목은 이 영화의 세 단편이 어떤 가족관계인지, 즉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묻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세 이야기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뉴욕 스토리>나 <에로틱 테일즈> 등 여느 옴니버스영화처럼 안에 담긴 에피소드들을 묶을 공통의 키워드가 없다. 스타 감독들이 모인 것도 아니다. <묻지마…>의 세 감독은 모두 신인이다. 단편영화제에서나 볼 법한 패키지를 꾸려와서 7천원 내고 보란다. 그래놓고 묻지 말란다. 대단한 배짱이다.

세 단편의 공통 키워드가 있긴 있다. 장진이다. 세편의 기획과 각색에 장진 감독이 관여했고 신하균, 정재영, 임원희, 정규수, 이문식 등 연극판에서부터 장진과 함께했던 이른바 ‘장진 사단’ 배우들이 각 편마다 역할을 바꿔가며 출연한다. 그러니까 장진의 이야기 구성력과 장진 사단 배우들의 맨 파워가 이 영화의 배짱의 근거이다.

<사방에적>은 각본까지 장진이 쓴 탓인지 셋 중 장진의 냄새가 가장 많이 배어나온다. 810호에 투숙한 남자는 외도한 애인에게 수면제를 먹여 재운 뒤 그녀의 몸에 휘발유까지 부었다. 이제 불만 붙이면 되는데 라이터가 안 켜진다. 장진 영화에 친숙한 관객이라면 눈치챌 것이다. 이 남자가 끝까지 불을 못 붙이리라는 걸. 장진 영화에서 의지를 가지고 중대한 일을 결행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우연한 사건의 방해를 받고 삼천포로 빠진다. 아닌 게 아니라 <사방에적>은 우연한 사건들이 여러 인간의 의지와 운명을 조롱하는, 전형적인 상황극이다. 익숙하다는 듯 장진의 장기가 살아난다. 호텔 각 방에 들어앉은 다양한 인간군상이라는 모티브가 <포룸>과 닮았지만, 화장실의 변기가 막히는 사고 같은 건 확실히 한국적 화장실 유머다. <매트릭스>에서 선보였던 정지시 360도 회전장면을, 카메라를 수백대 설치하는 대신 카메라가 다 돌 때까지 배우들을 정지시켜놓고 찍어서 내놓는, 저예산영화 티를 서슴없이 내는 모습도 재밌다.

<교회누나>의 남녀는 20∼30년 전 청춘영화의 주인공들을 닮았다. 서로 마음이 있으면서도 누나, 동생하며 만났던 학창 시절 관계의 틀을 누구 하나 먼저 깨지 못한다. 그 분위기에 맞춰 화면이 한 템포씩 늦게 바뀐다. 시종일관 밝은 배경이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의도하는 듯하지만, 어딘가 의뭉스럽다. 마침내 이별장면에서 둘이 기차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사랑해”를 외칠 때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슬픔이나 아련함이 정점에 오르려 할 때 황당한 사건을 던져 썰렁하게 만드는 것, 이것도 장진의 특기다.

<내 나이키>는 셋 중 이야기가 가장 쉽고 호소하는 정서도 보편적이다. 정치적으로 억압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하던 80년대 초반에 찍은, 빛바랜 가족사진 같은 영화다. 중학생 명진의 아버지는 개인택시 얻는 게 꿈이다. 공부벌레인 고3 큰형은 1등 한번 해보는 게, 둘째형은 주먹으로 ‘짱’되는 게 소원이다. 이 여러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30분 조금 넘는 분량에 꽉 차게 집어넣는 구성이 깔끔하지만, 이 단편에서는 장진 사단의 배우들이 유달리 돋보인다. 큰형 임원희, 작은형 류승범은 얼굴 자체가 캐릭터다. 동네 골목에서 중학생들의 돈 뜯는 고교생 정재영과 신하균은 진짜 양아치 같다. 그냥 교복을 입은 모습만으로도, 공부 못하고 껄렁껄렁한 고교생의 아우라가 절로 나온다. 관객이 웃을 채비가 워낙 잘돼 있어서, 이들이 별말을 안 해도 웃는다.

장진의 유머는 종종 반대되는 항목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의지적 인간과 우연한 사고, 감정의 고양과 썰렁한 사건이 부딪힌다. 어떨 때 그 충돌은 이 사회와 사람 안에 숨은 큰 모순덩어리를 잡아낸다. <간첩 리철진>에서 리철진이 택시강도들을 만나 무기와 공작금을 털리는 대목은 장진식 유머의 백미다. 리철진은 혼자고 강도는 여럿이니 당하는 게 당연한데도, 간첩이 강도보다 약하니까 웃긴다. 나아가 이런 웃음 자체가 또 얼마나 웃긴 것인가. 그러나 웬만큼 치밀하지 못하면 그 유머는 진부하거나 썰렁해기지 쉽다. <킬러들의 수다>에서 장신식 유머는 가끔씩 위태로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그건 ‘장진 사단’ 배우들에게 힘입은 바 크다. <기막힌 사내들>부터 세편을 거치면서, 다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들은 개성 뚜렷한 자기 이미지들을 쌓은 것이다. <묻지마 패밀리>는 아기자기하고 맛깔나는 소품이다. 단편의 가벼운 리듬을 타고 장진식 유머가 원기를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진 사단 배우들이 버무리는 갖은 양념이 맛의 더 큰 비결이다. 임범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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