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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 정보라 작가 "복수를 행하는 과정을 쓰는 게 특히 즐겁다"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2-05-19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토끼 전등에는 저주가 하나 걸려 있다. 일면 단순해 보이는 이 저주가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집요하게 옭아매는지, 정보라 작가는 간결하고 담담하게 저술한다. 지난 4월7일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2022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한국 작가의 소설이 최종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한강 작가의 <흰> 이후 4년 만이다. 그는 현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되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복수의 방식을 빌릴지언정 냉철함을 잃지 않고 예리하게 각을 세워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작가의 말에서 정보라 작가는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말엔 “화가 나는 것도, 슬프고 억울한 것도, 너의 잘못이 아니니 화를 내도 괜찮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화를 내도 괜찮다며 복수하고, 투쟁하고, 연대한다. 두루뭉술한 위로보다 그의 소설이 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부커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5월19일에 출국한다고 들었다.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겠다. 함께 후보에 오른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의 사인을 받고 싶다고 말했던데 <낮의 집, 밤의 집>도 캐리어에 잘 넣어뒀나.

=캐리어에 넣는 게 아니라 품에 안고 갈 거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계시겠지만 그 사이로 잘 치고 들어가서 바로 사인을 부탁드릴 거다. (웃음)

-부커상 최종 후보에 노미네이트됐다.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나는 보통의 등단 과정을 거쳐 활동을 시작한 게 아니라 그냥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책을 내며 시작했다. 시작은 남들과 달랐지만, 지금처럼 하던 대로 해도 된다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또한 내가 몸담은 분야가 심사나 비평을 받지 못할 만큼 작품성이 떨어지는 분야가 아니라는 방증이라 생각돼 무척 기쁘다.

-<저주토끼>는 2004년 쓰레기 만두 파동이 발단이 됐다. 이 사건이 소설의 저주 이야기로 귀결된 과정이 궁금하다.

=사건이 터졌을 당시 외국에서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래서 쓰레기 만두 파동에 관해선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당시에 군부대로 납품하거나 외국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만두의 남은 물량을 해결했다던데 나의 8할은 만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두를 좋아한다. ‘그럼 그동안 내가 한인 마트에서 사먹은 게 다 그 만두겠구나. 그래도 별 탈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귀국해서 정황을 살펴보니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더라. 잘못된 사실로 인해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화가 났고,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진행한 ‘12지신 특집’에 참여하게 됐을 때 나는 토끼를 택해 쓰게 됐는데 토끼는 계속 무언가를 갉아먹는 초식동물이고 만두는 채를 썰어 소를 만드는 음식이니 그 둘을 연결지어볼 수 있겠더라. 만두 사건을 직접 인용할 순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예전에 들은 사건이 생각났다. 국가에서 쌀 자급자족 정책을 시행했을 때, 전통주를 만들던 집이 순식간에 밀주 양조업체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방향을 틀어 국가 정책으로 인해 폐가망신한 집의 이야기로 가닥을 잡았고, 이 사건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에 굉장히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저주를 끌어오게 됐다.

-분노가 글을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나.

=그렇다. 특히 복수를 행하는 과정을 쓰는 게 즐겁다. (웃음)

-<저주토끼>에 실린 단편 <머리>와 <몸하다>도 흥미롭다. 둘 다 임신과 출산을 겪는 여성들의 상황을 신랄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몸하다>를 쓸 때 나는 유학생이자 외국인 노동자였다.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고, 너무 바빠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내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 혼자 고민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학업과 일을 중단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임신과 출산이 각 연령, 세대, 계층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임신과 출산을 겪는 여성들에게 어떤 시선이 쏟아지는지에 관해 쓰고 싶었다. 이 소설을 쓴 게 20년 전인데, 지금도 가임기 여성들이 마주한 문제와 고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머리>는 불현듯 화장실에 나타난 ‘머리’와 주인공 여성, 일종의 모녀 관계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죽은 팔>이라는 소설을 썼다. 엄마와 아기가 사는 집 벽에 팔이 붙어 있고, 그 팔이 계속 벽을 친다. 전셋집 주인아저씨는 세들어 사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소음으로 인해 두 사람이 초주검 상태가 됐을 때야 와서 팔을 가져간다는 이야기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말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주변인들이 자기 멋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상황에 익숙하다. 결국 포기하고 살아가는 여성들,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에 관해 묘사하고 싶었다. 나중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결국엔 이렇게 소외받은 약자끼리 싸우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조가 유지되는 것 같다.

-<안녕, 내 사랑>은 <저주토끼>에 수록된 단편 중 유일한 SF다.

=연세대학교에서 SF 수업을 할 때 한 학생이 페이스북에서 만든 챗봇에 관해 발표했다. 인공지능끼리 인간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는데, 인간의 입장에선 그게 굉장히 무서워보였다는 거다. 들으면서 아무리 인간과 비슷하게 딥러닝을 시키더라도, 기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의식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자신이 창조했다고 해서 기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인간의 태도 자체가 오만이다. 그때 마침 내가 사랑하는 첫 핸드폰이 사망해서, 소설 속 1호를 내 핸드폰이라 생각하며 글을 썼다. (웃음)

-<머리>와 <안녕, 내 사랑>을 쓸 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입장을 고려했나. 두 소설 모두 화자인 인간 입장에서는 섬뜩한 결말이라 할 수 있지만, ‘머리’와 기계의 입장에선 해피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쪽에 이입하며 글을 쓰진 않는다. 다만 그 시기에 주인공이 뒤통수를 맞는 얘기를 정말 많이 썼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웃음)

-인터넷 괴담도 즐겨 읽는 것으로 안다. 어릴 때부터 이어져온 취향인가.

=맞다. 조선의 기이한 설화 같은 것도 재밌게 읽곤 했다.

-장르 문학을 쓰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인가.

=1998년 연세문화상에 당선된 <머리>가 첫 소설이고, 그전엔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신문에 실린 <머리>를 읽고 ‘사실적인 얘기는 언제 쓸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사실주의 문학이 장르 문학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한 질문이었겠지. 한때 사실주의 문학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지만 결국 잘 안됐고 2010년 무렵부터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썼다.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를 많이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 본인도 낯선 세계를 탐미하길 즐기나.

=예술이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문학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걸 되풀이하면 재미없으니, 계속 새로운 얘기를 보여줘야 하는 장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장르 문학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고. 또 전공 때문에 고전문학을 많이 읽는 훈련을 해와서인지 내가 쓸 때는 이것보다 더 재밌고, 새롭고, 특이한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장르 문학을 좋아하는 것도, 쓰기 시작한 것도 전부 재미에서 출발했다. 여전히 글 쓰는 게 재밌나.

=그렇다. 물론 마감은 괴롭지만. (웃음)

-20세기 러시아 문학에선 어떤 재미를 느껴 전공하게 됐나.

=러시아혁명 전후, 그러니까 1911년부터 1928~29년에 이르는 때는 모든 것이 허용되던 시기였다. 작가들도 이전 문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길 시도했고 심지어 제일 유명한 선언문의 제목이 ‘대중의 취향에 뺨을 때려라’였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대중 취향의 글을 전부 부수고 자신들만의 새로운 언어를 정립하겠다는 거였지. 그런 기개가 너무 좋았고, 그런 상황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가 굉장히 부러웠다.

-꽤 오랜 기간 한국문학을 읽지 못하고 해외 문학만 접해온 것으로 안다. 그 기간이 집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길게 보면 대학에 입학했을 때부터, 짧게 봐도 석사 들어간 이후였으니까 20년 넘게 해외 문학만 읽은 거다. 사고방식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면에서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한국의 독자들은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글을 좋아하고, 또 최근의 상황상 따뜻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선호하는데 나는 그런 쪽으론 전혀 재능이 없다. ‘다 불질러버리자’는 마음으로 글을 쓰니까. (웃음) <저주토끼>가 처음 발표됐을 때 한국에서 잘 팔리지 않았고, 번역된 후 오히려 해외에서 반응이 더 좋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생각한다.

-다른 인터뷰에서 ‘결말을 정한 뒤에 첫 문장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체로 결말을 먼저 떠올리는 편인가.

=특정 장면이나 소재에서 착상을 얻으면 결말부터 만들어놓는다. 그런 다음에 그 결말로 어떻게 이어지면 좋을지 시작을 떠올린다. 시작과 끝이 나오면 단편은 거의 다 됐다고 보면 된다. 사전 작업은 일주일에서 몇달까지도 걸리지만 줄거리가 나오면 단편은 2~3일이면 쓴다.

-한 공모전 심사평에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 주제의식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실제로 글을 쓸 때도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인가.

=과학문학상 공모전이었고 심사위원들의 관점, 취향 차이를 딛고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찾다보니 더 강조했던 것 같다. 상업 출판이거나 웹툰, 영상물을 위한 원고였으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장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맞다. ‘이렇게 쓰면 재밌겠지’ 하며 장르 기법만 갖다 붙이거나, 잘났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독자와 기싸움하는 작품은 결과가 좋지 않더라. 독자들이 어떻게 읽는지와는 관계없이 ‘나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하겠다’고 시작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

-연대와 투쟁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주요하게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그녀를 만나다> <안녕, 내 사랑>에선 연대의식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붉은 칼>과 <흉터>는 투쟁, 생존 문제와 결부돼 있다. 실제로 집회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데 그러한 현실에서의 활동이 글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

=최근까지도 글과 현실을 연결짓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무의식적으로 연결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저주토끼>를 2015년 말~2016년 초에 썼는데 그때 이미 세월호 농성장에서 서명을 받고 있었다. <머리>에선 문제의식이 막연하게 그려진 감이 있는데 <저주토끼>에선 국가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고, 그로 인해 복수를 행한다는 서사가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때부터 이미 글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 같다.

-2020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시간 인식의 차이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써온 소설과 결이 다른 주제다. 진행된 바가 있나.

=수학자 맥타가트가 쓴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에세이에서 얻은 발상인데 여전히 그 주제로 글을 쓰고 싶다. 얼마 전에 아작출판사에서 발간하는 SF잡지 <어션 테일즈> 편집장과 이야기를 하다가 ‘술 마실 때마다 시간 여행을 하는 SF소설을 써볼까’라고 했는데 너무 좋아하시더라. 재밌을 것 같은데 접근하기 쉽지 않은 주제라 고민하고 있다. 시간 여행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분야도 아니고 과학적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확정된, 말하자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여튼 7월 말까지 써야 하는 위기에 놓여 있다.

-차기작도 기대하고 있겠다. 현재 SF작가연대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대표로 활동하는 기간 중에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처음 시작할 때의 목표는 괜히 대외 활동을 하다 연대원 중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지 않게 하자는 거였다. (웃음) 최근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여기저기서 다양한 제안과 의뢰가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글을 열심히 써서 같이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것으로 목표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SF 장르나 장르 문학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커져왔으나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면서 주목도가 한층 높아진 듯하다. 장르 문학, 혹은 SF소설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저주토끼>는 SF가 아니다. 유사품에 속지 않으시길 바란다. (웃음) 그리고 책이 상을 받았거나 후보에 올랐다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재밌게 읽었으면 한다. 정말 다양한 작가들이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입맛대로 한 작가만 파도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 있을 거다. 물론 SF작가연대 연대원들의 작품을 읽어주시면 더욱 좋겠다. (웃음)

내 인생의 영화

태국의 공포영화 <셔터>. 근 5~6년간 여름마다 연례행사처럼 <셔터>를 봤다.

나의 소설 중 영화, 드라마로 만나보고 싶은 작품

2008년 제3회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호>(狐)라는 소설이 있다. 14년 만에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봤는데 내가 한때 굉장히 발랄했더라. (웃음) 구미호가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러브 스토리고 액션도 많다. 큰 개가 등장해 춤도 추고 말도 하고. 영상화가 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의 책

페터 회 작가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정말 매혹적이다. 추리소설이지만 SF적인 요소가 명백하게 담겨 있고, 거리낌 없이 싸우고 분노하는 강렬한 여성주인공이 등장한다. 나는 남성 작가가 그렇게 강한 여성 캐릭터를 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 역시 그렇게 강렬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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