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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간과 로봇 사이, 영화라는 기억 장치 '애프터 양'
김소미 2022-06-01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현상금 사냥꾼 릭 데커드는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라고 묻는다. <애프터 양>에서 코고나다 감독은 바꿔 질문한다. 안드로이드도 기억하는가? <애프터 양>이 그리는 근미래는 고도로 발달한 테크노 사피엔스가 보편화된 사회다. 이들은 다인종·다문화 가정에 보급되어 세계 각국의 유산을 일깨워주는 ‘세컨드 시블링스’로 활약하는 지성체이고, 고장난 채 오래 방치되면 부패하는 유기체다. 차(茶) 상점을 운영하는 제이크(콜린 패럴)와 회사 중역인 키라(조디 터너스미스) 부부 역시 입양한 중국인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를 위해 중국인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과 가족을 이룬다. 영화는 원작인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소설 제목처럼 어느 날 갑자기 ‘양과의 작별’이 가족에게 당도한 이후의 여파를 천천히 관찰해나간다. 수리업체를 전전하던 제이크는 양의 중심부에 숨겨진 기억 장치가 있으며, 오래된 리퍼 제품이었던 양에게 또 다른 세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면 좋겠어요.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해요. 장소와 시간에 관해서요.” 안드로이드 양의 간절한 바람은 그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이후에야 진실로 밝혀진다.

<콜럼버스>에서 한 차례 시험한 것처럼 코고나다는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공간을 프레이밍을 통해 다시 한번 정제하는 비주얼리스트적 면모를 <애프터 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일상에 깃든 정적과 침잠, 찰나의 활기는 이번 영화에서 더욱 세밀하고 고혹적으로 그려진다. SF영화가 곧잘 기대는 금속성의 미장센이나 미니멀리즘의 조류를 뒤로한 선택 역시 서사와 유려하게 조응한다. <애프터 양>의 인물들은 천연염색한 면직물을 입고서 오후의 풀밭, 새벽녘의 거실을 떠돌고 양의 디지털 기억 장치 속을 탐험하는 여정은 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꿈처럼 표현된다.

코믹하고 역동적인 가족 댄스 신 직후 양이 고장나는 장면처럼 담담한 아이러니들도 돋보인다. 평화롭고 서정적으로 보이는 일상의 깊은 저류에 불길함도 함께 흐른다는 사실은 <애프터 양>이 일찌감치 제시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미래 사회가 디스토피아적 실체를 교묘하게 지우는 방식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한편 오랜 세월을 기억하는 로봇과 그를 상실한 인간들의 애도는 종종 독특한 편집술로도 조우한다. 기계 인간의 기억법에 대한 코고나다의 상상력은 같은 순간이 다른 관점으로 반복되는 몇몇 장면에서 몰입 대신 관찰과 탐구를 유도한다. 감독이 직접 편집했기에 가능한 약간은 까끌한 문법이야말로 <애프터 양>의 잔상을 오래 지속시키는 확실한 개성이다.

명대사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저는 괜찮아요.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요."

: 노자의 말 “애벌레에겐 끝이지만 나비에겐 시작이다”에 관한 안드로이드 양의 생각.

CHECK POINT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이와이 슌지 감독이 창조한 가수 릴리 슈슈가 20년 후 <애프터 양>에서 자신을 기리는 티셔츠를 입은 테크노 사피언스들에 의해 부활했다. 외로운 소년 유이치가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해 의지했던 노래 <Glide>는 이번에 양과 미카 남매를 연결하는 돌림노래가 되어 상실에 빠진 인물들을 위무한다. 세기말에 ‘Y2K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등장한 가상의 존재가 최신의 SF에 침투한 결과, 코고나다의 미래는 과거의 어느 때처럼 아득한 노스탤지어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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