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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 X 조선희 작가 대담②
배동미 사진 오계옥 2022-06-17

아름다움과 도덕에 대한 질문 <시>

조선희 1997년 <초록물고기>로 데뷔해서 감독님의 영화인생이 25년인데, 필모그래피는 단순소박해요. 6편뿐이거든요. 홍상수 감독이라면 25편은 찍었을 텐데.(웃음) 어쨌든 이창동 감독님은 영화를 그렇게 많이 찍진 않으셨어요. 그래서 이번에 마스터클래스 준비하면서 조금 쉬운 편이었어요. 영화를 많이 볼 필요가 없었고 6편을 이미 다 봤거든요. <버닝> 이게 조금 문제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것만 한번 더 보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박하사탕>을 2000년 무렵 여러 번 봤는데, 그땐 너무나 정치적인 코드로만 이해했던 것 같아요. 격동의 시기였고 제가 아직 40대여서 그랬던 것 같고요. 다시 보니 <박하사탕>은 어떤 슬픔에 대한 영화였어요. 젊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 관계들, 스러지는 관계들, 폭력을 쓴 쪽이나 폭력을 당한 쪽이나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말 영화라는 게 어느 시기에 보느냐, 어느 나이에 보느냐, 몇 번째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이창동 <박하사탕>을 정치적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게, 1987년 무렵의 고문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할 진압군으로 광주에 투입돼 무고한 어린 여학생을 살인하는 장면이 등장하죠. 또 주인공의 거꾸로 가는 서사의 종착지가 광주인 것처럼 구성돼있고요. 주인공 한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한국 사회의 20년에 걸친 역사를 거꾸로 가는 서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치사회적인 것이 배제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초월적인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제가 <초록물고기>를 만들고 난 뒤에 황지우 시인이 저한테 “좀 초월적인 이야기 좀 해봐라”고 하더군요.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제 딴엔 초월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만든 게 <박하사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초월을 꿈꿔도 삶의 구조까지 초월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삶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면서 각자 초월을 꿈꾸는 것일 뿐이지. 인간이 정치에 무관심할 순 있어도 정치가 우릴 놔주지 않습니다. 우린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담하다 해도 그건 정치의 어떤 힘이 그렇게 만든 것이거든요. 그러나 구조를 벗어날 순 없더라도 그 안에서 초월적인 것, 삶의 어떤 본질적인 모습, 실존에 대해 이야기해볼 순 있죠. 시간, 슬픔, 나이듦에 대한 것.

조선희 감독님 영화 중 내심 <박하사탕>을 최고로 꼽고 있었거든요. 근데 이번에 필모그래피를 다시 보면서 <>에 완전히 꽂혔어요. 사실 <>를 시사회서 한번 보고 그 뒤로 다시 안 봤거든요. 다른 영화들은 한번 이상 봤는데, 다시 보지 않은 데엔 어떤 심리적 근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가 감독님의 영화 중 성적도 제일 저조했죠?

이창동 그랬죠.

조선희 그 이유도 저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가 2010년 영화잖아요. 우리가 2009년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겪었죠. 그래서 <>라는 영화가 굉장히 정치적인 코드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제가 이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그중 하나는 너무 정치적 코드로 이해해버렸던 것. 영화의 오프닝 기억하세요? 강물 저 멀리서 뭔가 떠내려 오는데 교복 입은 중학생의 시체에요. 시체구나, 여학생이네 정도의 정보만 전달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게 제 바람이었어요. 근데 감독님이 그 시체를 클로즈업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끄는 거예요. 그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감독님이 우릴 고문하고 있구나’였어요. 어떤 죽음에 대해서 책임과 죄의식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꼈고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첫인상이 그러다보니 모든 설정을 그에 대입시켜서 보게 됐죠. 그리고 이 영화를 두번 보지 못한 다른 이유는, 제가 <> 촬영장에 갔거든요. 가끔 촬영현장에 갈 기회가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영화관에서 그 작품을 볼 때 몰입이 안 되더라고요. 픽션에 대한 추앙이 있어야 하는데, 만들어지는 과정을 제가 슬쩍 엿봤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죠. 이 두 가지 이유로 <>가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를 보면서 어찌나 걸작인지…. 이건 심하게 걸작이구나! 감독님이 40대에 데뷔했기 때문에 젊은 혈기가 많지 않은 신인이었으나, 그래도 <박하사탕>을 보면 그 시기에 풋풋하고 살짝 치기어린 것들이 보여요. 그런데 <>에 이르면 그 모든 게 적절하게 자리 잡았고, 무르익었다고 느껴져요. 감독님의 디테일과 설정의 리얼리티가 감독님의 가장 큰 장점인데, 그것이 극 전반에 걸쳐서 너무나 무르익어 녹아있어요.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저는 <>를 발견해서 정말 즐거웠어요.

이창동 <>는 개봉 무렵에 이미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영화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저는 그런 의도로 만들지 않았어요. 아마 그렇게 해석된 건 사람들의 심리 속에 <>에서 얘기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로 치환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다만 저는 그런 해석을 부인하진 않았어요. 지금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는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학생의 고통과 그걸 바라보는 가해자의 할머니 양미자(윤정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하죠. 그래서 손자가 저지른 범죄와 이 세상의 더러움이 아름다움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우리 사회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더러움이 당시 사람들에게 집단 무의식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 그렇게 읽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죠. 그렇지만 영화를 그런 의도로 만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이런 겁니다. 조선희씨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제가 80년대에 글 쓴 작가잖아요. 80년대는 세상이 눈앞에서 너무 부조리해 보이는데, 나는 글 쓰고 있어야 하니까 내가 예술을 하든 문학을 하든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데 무슨 역할을 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였어요. 어떤 형식의 문학을 하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린 다 그런 자의식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문학을 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심장소리>에서 해고 노동자를 언급하는 게 습관이 된 게 아니냐고 하셨는데, 그럴지도 모르죠. 말하자면 내면화된 거죠. 영화라는 것은 관객이 돈을 주고 볼 만한 뭔가를 제공해야 하는 매체인데, 저는 그런 매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순수한 오락물의 형태를 추구할 수 없어요. 저로서는 이야기가 더 단순해질 수 없어요. 왜냐면 제 내면에 이미 그렇게 돼있기 때문이에요. 10대 때 글이란 걸 처음 끄적거리기 시작하고부터 <>란 영화를 만들 때까지 줄곧 절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것이 세상의 도덕과 어떤 관계가 있지?’ 라는 것이에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감독

조선희 사실 감독님 영화들에는 멜로와 러브스토리가 살짝 들어가 있거든요. 근데 <>에서만큼은 보이지 않아요. 사랑 대신 시라는 영혼의 가장 고양된 상태를 영화의 설정으로 내세운 것 같아요. 이번 대담을 준비하며 감독님 영화를 관통하는 고유한 게 뭘까 생각을 해봤어요. 폭력과 죄의식이란 단어를 뽑아내게 되더라고요. 폭력이란 건 국가에 의한 폭력일 수가 있겠죠. 그건 <박하사탕>에서 여러 형태로 보여진 것이고요. 또 개인들 사이의 폭력도 있죠. 가장 끔찍한 건 <오아시스>에서 표현된 가족 안의 폭력이죠. 가족 안에서 폭력에 희생되면 완전 범죄라서 그냥 묻혀버리죠. <>는 폭력과 죄의식의 문제를 가장 정면으로 담은 것 같아요. <>의 중심에 중학교 소년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어요. ‘악의 평범성’이란 말 있잖아요. 전 소년들을 보면서 그 말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가해자들은 겁 없는 ‘중딩’들이라 게임하고 어른들을 보면 인사성도 밝아서 인사도 잘하는, 아주 평범한 중학생들이예요. 이들에겐 죄의식이 없어요.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로 죄의식이 없는 걸로 그려져요. 경찰, 학교 심지어 기자까지 한통속이 돼서 카르텔을 형성하잖아요. 그 안에서 유일하게 죄의식으로 갈등하는 사람이 바로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주인공 양미자죠. 양미자는 시상을 어디서에서 찾을까, 시어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노력하는 인물인데, 영화 마지막에 그의 죄의식이 시가 되죠. 폭력과 죄의식이란 주제가 그동안 감독님 작품에서 쭉 일관되게 다뤄져왔다면 <>가 마지막 클라이맥스, 결정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이창동 당연히 폭력과 죄의식이 영화 속에 있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폭력과 죄의식을 넘어선 어떤 것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아름다움이란 것이 뭔지에 대해서요. 작가든 영화감독이든 화가든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믿잖아요. 그래서 그걸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란 게 과연 뭔가에 대한 질문을 빼놓을 수 있는 거예요. 아름다움은 노을이나 꽃을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잖아요.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일반인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돼있고, 자기 삶의 아름다움이란 걸 항상 느끼게 돼있어요.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뭘까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관객들이 자기 삶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길 바랐던 것 같아요. 제 영화에서 일관된 것이 있다고 스스로 믿는 건,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려고 했다는 것이에요. 관객들이 그 질문을 각자 가슴에 받아 안길 바랍니다. 그에 대한 답은 퀴즈처럼 당장 알아맞히는 게 아니라, 관객이 삶을 살아가면서 그 질문을 하고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랐어요. 아름다움이란 뭘까, 내가 경험하는 일상의 부도덕, 윤리, 이런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런 걸 질문하길요. <박하사탕>이든 <오아시스>든 <초록물고기>든 <밀양>이든 그 질문이 조금 더 단순하냐, 좀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냐 차이는 있겠지만, 항상 관객에게 질문을 하려 했던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중첩적으로 더 많은 벽을 가지고 관객에게 질문한 작품이 <버닝>이었습니다. 그 전까지의 질문은 더 직접적이고 직진하는 형태였다면, <버닝>은 굉장히 여러 겹의 질문이었죠. 세상에 대한 질문일 뿐 아니라 서사나 영화나 남의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런 것에 대한 질문까지도 포괄하는, 말하자면 변주된 질문이라고 할까요?

조선희 네,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왜 찍었는가, 결국은 오늘 대담이 그 주제에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이 먼저 자복을 해주셨어요. 이제 <버닝> 얘기를 해야죠.

*본 기사는 '이창동 감독 X 조선희 작가 대담③'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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