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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박찬욱 영화의 정서적 만조 '헤어질 결심'
김소미 2022-06-29

“살인 사건이 좀 뜸하네… 요새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우아한 태와 다르게 형사 해준(박해일)은 그의 아내가 묘사하는 것처럼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기쁜” 남자다. 어느 날 산악 유튜버 기도수가 바위산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타살 의혹을 품은 채 기도수의 중국인 부인 서래(탕웨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불면증이 심해 잠복을 즐기는 형사는 여자를 취조하는 동시에 매일 밤 망원경으로 엿본다. 해준을 사로잡은 것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고 의외로 정연하며, 결국 정확해지고 마는 서래의 문장들이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를 위해 ‘부검’, ‘방수’ 따위의 단어를 쉽게 설명하고 싶지만, 풀어서 말하려 할수록 그의 마음은 뒤엉킬 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추방될까 두려워 신고하지 않고 살아온 서래는 건너온 생의 고비만큼 초연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낮에는 간병인으로 일하고 매일 아이스크림과 담배 한대로 저녁을 때우던 여자에게도 새로운 바람이 생긴다. “저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갖”고 싶다는 것. 영화는 사명을 느끼는 탐정이 팜므파탈의 유혹을 마주하는 누아르의 관습 아래서 이를 위배하는 희한한 디테일들과 사소한 유머를 쌓아나간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이전 영화들보다 차라리 그의 사진을 닮아 있는 영화 같다. 프로덕션의 양식미는 덜어내고 편집을 통해 인물과 자연, 로케이션에서 뉘앙스를 추출해내는 가운데 응시는 더욱 깊어졌다. 수사극이라는 수식이 무색하게 두 남녀는 오감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일들을 펼쳐가는데, 영화에서 유독 부각되는 것은 시선과 언어, 그리고 호흡이다. 히치콕의 보기가 관음에의 매혹이라면 박찬욱의 보기는 그보다 무구한 호기심에 가깝다. 복수심, 강박 등 병든 내면을 탐미적으로 해부하는 작가인 박찬욱은 품위 있는 성정과 사회적 족쇄에 묶인 사랑의 처참한 경로를 또 한번 황홀하게 따라간다. 영화는 차마 감지 못한 시신의 눈, 핸드폰 화면의 액정 등을 이용해 하염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엿본다. 한편 뜻이 통하지 않을 때도 각자의 언어를 천연덕스레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는 스마트폰 번역 앱, 전자시계를 통해 소설적 감흥도 돋운다. 디지털 기기로 발생한 소통 양식과 영화 문법 사이에 절묘한 접점을 마련한 <헤어질 결심>의 몽타주가 결과적으로 고풍스럽게 다가온다는 점도 흥미로운 요소다.

슬픔 앞에서 물에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반응하는 이가 있다면, 사랑 앞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천히 젖어드는 사람에게도 마침내 파도는 친다. <헤어질 결심>은 뒤늦은, 그러나 그만큼 거센 사랑의 파도에 관한 영화이며 박찬욱 감독은 만조의 경지로 미결된 사랑 앞에 장탄식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지만,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도 있어."(<헤어질 결심>의 형사 장해준은 타인을 묘사하듯이 자신에 관해 발설하는 부류의 사람이다.)

CHECK POINT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속 음악 교사 베로니끄(이렌 자코브)는 자신을 미행하며 흔적을 남기는 인형술사의 존재를 알아차린 뒤 즉각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서로를 향한 침착하고 집요한 탐구 끝에 어느 날 조우한 두 남녀는 베로니카의 가방 속에서 립밤, 고무공, 언젠가 찍은 필름 사진 같은 것들을 꺼내어 만진다. 어떤 감독들은 영화적 재료가 되기엔 사소하고 보잘 것없어 보이는 일상의 도구들 사이에서도 쓸쓸한 기운을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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