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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평론가의 '외계+인' 1부, 시대‘인식’적 역행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는 힘들지만,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는 이해된다. 쓰는 내내 비판하고 싶은지 해명하고 싶은지 혼란을 겪다가, 선택을 유보한 채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건 하나다. 재미. 관객의 평균적 즐거움을 건드릴 수 있다면 모든 비판은 헛소리로 만들어버릴 힘이 그의 영화에는 있었다. <외계+인> 1부는 최동훈의 영화 중 이례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다. 그중 재미를 기준으로 삼는 쪽에서 부정 의견이 많은 점은 의외의 현상이다. 재미없고 난삽하다는 의견이 혹평의 주된 반응이라면, 호평하는 쪽은 한국 외계 소재 영화의 시도와 기술적 성취 등을 이유로 삼는다. 다만 재미 면에서는 볼만하다는 정도의 다소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달라진 건 관객일까, 감독일까. 분명한 건 다수의 관객을 공략하려는 영화의 시도에 주황색 경고등이 켜졌다는 사실이다. 최동훈이 두개로 분리된 시대를 동시에 다룬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단순한 서사적 재미 추구 이외에 다른 목적이 감지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주로 새로운 관객층에 어필하려 한 결과라면, 고려를 배경으로 한 과거 이야기는 이전 세대의 즐거움을 되살리고 이를 새로운 세대에 전수하려는 욕망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일단 이러한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마블과 DC를 중심으로 한 시리즈 영화에 익숙한 관객은 기시감을 느낄 뿐 그와 비슷한 시도가 국내에서 뒤따르는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최동훈의 영화 세계를 따라온 관객은 그의 영화와 공감대가 옅어졌다는 사실을 낯설고 어색해한다. <외계+인>이 한쪽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결과물로 보이고, 다른 쪽에는 시대를 앞선 결과물처럼 보인다는 사실 역시 하나로 모일 수 없는 관객을 동시에 공략하려는 무리한 욕망이 작용했음을 방증한다.

만약 최동훈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분석해야 할 대상이다. 최동훈은 적어도 대중성에서만큼은 실패를 모르던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혼종성은 곧 오늘날 사회의 혼종성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관객의 외양을 평균내서 만든 거울 속에는 그 누구의 얼굴도 닮지 않은 괴물이 비칠 뿐이다. 한편 이 말은 그의 영화가 실패를 통해 관객성이 하나로 통합될 수 없음을 드러낸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외계+인>의 흥행이 불확실한 상황은 한국영화에서 과거와 같은 방식의 평균적 즐거움을 공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나타내는 신호일 수 있다. <외계+인>이 거울이라면 그것은 상을 제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제대로 비추는 데 실패함으로써 기능하는 거울인 셈이다. 작품에 관한 개인적 호불호를 고백하는 것보다는 이런 결과물이 도출된 경로에 대한 탐색이 지금으로선 필요해 보인다.

잊힌 기원을 세우다

다중 주인공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이들이 구사하는 액션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손의 액션에 치중한다는 사실이다. 액션이라고 하면 주로 인간의 발 혹은 기계의 움직임 등이 먼저 떠오르는 상황에서 <외계+인>은 손에 의한 액션에 올인한 점이 주목된다. 손으로 죄수를 제압하는 가드(김우빈), 장풍을 쏘는 무륵(류준열), 천둥을 쏘는 이안(김태리)의 액션 모두 결정적인 역할은 손에서 비롯된다. 외계 죄수와 대결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가드는 손에서 내뿜은 불로 죄수를 제압하고, 손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 숨은 죄수를 추출한다. 이러한 설정이 독특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정확한 기원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흔하다. 다만 시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의도 혹은 야심이 노출된다.

타이틀 시퀀스 직후 가드가 존재하는 현대와 무륵이 존재하는 고려 시대가 교차할 때 영화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한숏에 잡아, 페이드인과 페이드아웃을 동시에 진행하는 방식으로 두숏을 중첩한다. 시대나 인물이 말끔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짐을 예측하게 만드는 전환이다. 고려 시대 의복을 입고 도술을 선보이는 무륵의 얼렁뚱땅 액션은 가드의 매끈한 금속성 액션과 간극이 큰 만큼 둘 사이를 이으려는 무의식적 충동을 자극한다. 무륵은 상시 휴대하는 부채를 휘젓거나 두 손바닥 사이에 모은 기로 사람을 하늘 끝까지 날려버린다. 이는 터무니없는 과장법이자 액션의 환영을 창조하는 고전적 방식이다. 기를 모아 손을 뻗는 숏A 뒤에 사람의 몸이 날아가는 숏B를 붙이면 관객은 그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고 A에 의해 B가 반응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

무륵의 과장된 액션은 관객이 영화에 접속할 수 있는가를 가르는 시험대다. 마술쇼에서 최고의 관람객은 영화의 트릭을 의심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를 믿고 즐기는 관객이다. <외계+인>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 역시 그렇다. 최동훈은 로봇이 손바닥에서 불을 뿜는 히어로 액션물을 무리 없이 즐기는 오늘날 평균적 관객에게 그 동류로서 동양의 무협 액션을 과장된 방식으로 세운 뒤, 그렇다면 ‘이 정도 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습니까’라며 눙치는 듯하다. 덧붙여 최동훈은 현대 시리즈물이 기술적 액션의 모델처럼 인식되는 상황을 부정하고, 무술과 도술에 기반을 둔 동양의 움직임에 의지해 새로운 기원을 세우려 한다. <외계+인>의 액션이 유치함을 넘어 어딘가 난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유치함에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빌런인 외계 죄수는 손의 액션을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것 같은 다중촉수 형태로 등장한다. 세뇌된 인간이 손을 뻗어 공격의 제스처를 취하면 촉수는 그가 의도한 방향과 강도로 이동하며, 사람의 몸을 날려버리거나 칼처럼 몸속으로 파고들어 마비시킨다. 촉수형 크리처는 첨단 기술로 구현된 결과물이지만, 그 외양은 고전적인 형태를 연상시킨다. 살인귀(지건우)가 무륵을 쫓는 장면에서 부각되는 촉수는 흡사 긴 밧줄이나 거대한 능구렁이처럼 보인다. 촉수는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굵고 긴 선이기에 그것이 인물을 쫓아 움직이는 장면은 곧 촬영 동선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 같은 인상을 불러온다. 그런 지점에서 촉수는 눈과 관련되지만, 직접적으로 환유하는 신체는 어디까지나 손이다. 영화는 조바심을 내듯 크리처 외향의 기원을 보여준다. 밀본에 위치한 100개의 손이 달린 불상은 촉수형 크리처의 근원에 동양의 불상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흑설(염정아)의 거울을 통한 액션에서도 역사적 유물이 전통적 기원의 자리에 위치한다. 다뉴세문경은 대상을 비추는 기능 외에 무언가를 투과시키는 통로로 기능하며 투과한 사물이나 신체를 엄청나게 부풀리는 요술을 부린다. 청동거울의 위력은 이안이 쏜 천둥 알이 엄청나게 부푼 채 날아가는 천둥 액션 시퀀스에서도 빛나지만, 결정적인 장면은 흑설의 거대 손 시퀀스다. 흑설은 자장(김의성) 무리와 대결하던 중 거울에 손을 투과시켜 엄청나게 불어난 손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기는 액션이 종말을 불러올 때, 이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 손 액션의 상징이 되었다. 반면 물리적인 크기를 부풀리는 <외계+인>의 방식은 피식피식 웃음이 터지는 만화책에서 상상력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손의 코믹한 활약은 흡사 최첨단 수동 장치를 마주한 것처럼 덜 위협적이되 더 친근하다.

손에 의한 액션의 레퍼런스는 픽션의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액션은 터치와 클릭 등으로 거의 모든 것이 이뤄지는 생활상을 염두에 둘 때 그리 허황한 것만은 아니다. 스마트폰의 상용화로 휴대폰은 버튼과 통화 중심의 단순한 도구에서 액정과 터치에 기반을 둔 다중 작업의 도구가 되었다. 터치를 통해 화면을 밀거나 당기면 그에 반응해 무언가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일도 간단하게 이뤄진다. 이는 과거의 시점에서 생각하면 일종의 마술이다. 스마트폰은 손에 의한 액션의 터전이며, 그 안에 <외계+인>에 대응할 동작들이 잠재되어 있다. <전우치>에서 전광판과 같은 막을 투과하는 액션을 통해 시대를 반영한 것처럼 <외계+인>의 손 역시 오늘날 기기 문명을 느슨하게 환기한다. 이것은 뒤바뀐 기원이자 잊힌 기원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신문물의 근원을 따지고 들면 철 지난 픽션에 의한 만화적 상상이 필시 자극제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마비에의 저항

<외계+인>에서 주된 분란은 신검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이들이 신검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각자 목적이 다를 뿐만 아니라 딱히 목적이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전우치>의 만파식적이 그랬듯 신검은 맥거핀에 가까워 보인다. 신검을 둘러싼 활극 옆에는 인간의 몸을 죄수의 감옥으로 사용하는 상황을 둘러싼 갈등이 부각된다. 외계 죄수의 감옥이 된 인간의 형상은 병원 시퀀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열린 하늘 사이 나타난 우주선으로부터 돌 하나가 병원 건물 내부에 침투한다. 돌은 무한대로 분열해 내부에서 빛을 뿜는 반쯤 열린 거대 석상으로 탈바꿈한 뒤 촉수 다발을 쏘아대며 본색을 드러낸다. 촉수의 공격을 받은 인간은 저항할 사이도 없이 정신을 잃고 마비되거나 공중에 몸이 떠오른 채 반죽음 상태에 이른다. 물론 외계 죄수의 활동이 종료되면 인간은 방금까지의 기억은 잊은 채 일상에 복귀한다.

몇몇 죽음의 사례를 제외하면 외계 죄수들의 공격은 살인이 아닌 마비에 그친다. 신검을 손에 넣기 위한 액션 장면에서도 상대를 마비시키는 방식의 공격이 두드러진다. 자장은 약을 탄 밥을 먹여 다른 인간을 마비시킨다. 밥을 먹은 뒤 이안은 혼절하고 신선 흑설과 청운(조우진)은 움직임이 마비되고 정신만 또렷한 상태로 해독제를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흑설과 청운은 눈에는 눈, 마비에는 마비로 대항하듯 부적을 자장의 몸에 붙이거나 항아리에 담아 부적으로 봉하는 방식으로 자장을 포박해 반격을 노린다. 외계 죄수에 대항한 인간의 싸움에서 최대의 적이 마비라 할 때, 이는 액션과 움직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표하기 위해 설계된 전개로 보인다. 무엇을 소재로 삼든 최동훈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액션이었다. 액션은 배우의 움직임이 중심이 될 것이나, 때로는 말이나 대사의 액션도 포함하며 <타짜>나 <도둑들>에서 두드러진 편집 등 배우의 액션에 조응하는 제작 전반의 액션을 두루 포함시켜야 한다. 감독은 액션이 마비된 상태를 미리 예측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력을 키우기 위해 백신을 만들듯 마비와 움직임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마비에의 공포와 저항은 인간의 액션이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했음을 시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액션은 앉은자리 혹은 실제 동선을 최소화한 상황에서 비대면으로 이뤄진다. 휴대 기기가 제공하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액션은 무한히 가능하다. 더불어 목소리로 지시하는 핸즈프리형 음성인식 AI의 상용화가 촉각을 예전의 것으로 인식시키는 중이다. 이는 음성에서 촉각으로 옮겨왔던 흐름을 생각할 때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기술은 점점 인간의 실제 행위는 줄이고, 가상의 이동은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더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홈시어터 기술은 관객이 극장에 가는 대신, 극장이 관객을 찾는 환영을 작동시킨다. 기술의 효용은 액션을 덜어낼수록 상승한다. 기술이 최소 움직임으로 최대 효과를 도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중임을 인정한다면, 액션이 위기에 빠졌다는 영화의 진단이 늦은 감은 있어도 불필요하지는 않다.

영화 관람을 둘러싼 변화에 직면한 감독은 현재의 위기를 외계 죄수의 침공에 의한 일시적 마비 상태라 상정한 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한 액션의 구현이 가능한 상상의 도피처를 지은 것인지 모른다. 최동훈이 자신의 영화에 자기반영적 거울상을 배치해둔 경우를 생각할 때, 이는 터무니없는 가설만은 아니다. <전우치>에서 감독은 시대극을 촬영 중인 영화 세트장을 주요 배경 중 하나로 삼았다. 이는 조선과 현대를 넘나드는 중심 이야기가 실은 세트에 의해 꾸며진 것임을 노출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그림 속에 봉인되었다가 현대에 풀려난 도사의 이야기는 요약하면 인물이 고정된 상태에서 시대만 점프한 상황을 뜻한다. 이는 곧 배경과 세트 변화를 중심으로 시공간의 이동을 표현하는 영화 제작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이야기로 풀이된다. <외계+인>에서 역시 몇몇 장면은 마치 세트장이 노출된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자동차가 튀어나오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초가집 사이에 신식 자동차가 놓인 풍경은 마치 영화 촬영 중인 세트장이 노출된 것처럼 어색해 보인다. 부감숏은 이러한 느낌을 강조한다. 외계 죄수에 맞선 가드의 싸움을 보여주는 도심 액션 시퀀스에서도 몇몇 숏은 실제를 그대로 옮겨온 그래픽 이미지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미숙함과 엉성함의 결과이기보다는 과도함과 솔직함의 흔적처럼 보인다.

불필요한 동작을 줄이고,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것을 지향하는 흐름 속에서 최동훈의 영화는 이에 역행하는 덧붙임을 보여준다. 제목 가운데 덧붙은 기호 ‘+’는 과잉의 미학에 대한 선언이자 생략에의 거부를 드러낸다. 그럴듯하게 접합한 채 이음매를 생략하는 대신, 이음매를 펼쳐둔다. 하늘이 열린다는 은유적인 표현은 그의 영화 속에서 실제로 구멍이 되어 열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점프컷으로 무마하는 것이 아니라 촌스럽더라도 어떤 막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는 영화가 구현한 세계가 그 위에 구멍을 새겨 넣을 수 있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작용의 원리와 실행이 분리되어 원리는 생략된 채 작용만 범람하는 현실 속에서 영화는 작용의 뿌리로서의 원리를 되살리고 생략된 연결 지점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시대착오적 역행이라는 딱지보다는, 시대인식형 역행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인다.

거울과 통로

영화에 관한 비판과 아쉬움은 뒤집으면 하나의 의도가 되고, 그 의도에는 의미가 생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인>은 굳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2부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더라도 완료된 텍스트라기보다는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는 미완의 텍스트다. 끝내 마술쇼의 관객이 될 수 없는 관객은 그것의 의도를 알아챈 다음, 이것을 시대반영적 액션을 사유하는 영화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가차 없이 외면할지 선택해야 한다. 속는 셈치고 거울을 통과해볼 것인가, 아니면 본래 기능을 잃어버린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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