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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밤’ 윤서진 감독, 추경엽 촬영감독 “조금씩 천천히 스며드는 빛”
조현나 사진 백종헌 2022-08-11

원형(강길우)의 아버지는 야간 경비원이다. 아파트를 순찰하던 그는 예기치 못한 죽음을 목도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다. 한편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활동하던 원형은 퇴근하고 돌아온 늦은 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집을 나선다. 원형네 가족의 공간은 초록으로 가득하다. 한낮은 싱그러운 자연의 초록으로, 밤은 초록빛의 가로등 불로 밝게 빛나는데 어쩐지 그 찬란한 빛들이 시종 서늘하게 느껴진다. 윤서진 감독은 <경주> <꿈의 제인> <경아의 딸>의 조명과 <제8일의 밤> <이타미 준의 바다> <마이썬> 등의 촬영을 맡은 추경엽 촬영감독에게 직접 연락해 협업을 제안했고, 함께 자신의 첫 장편 <초록밤>을 완성했다. <초록밤>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CGK 촬영상, CGV 아트하우스상,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미장센을 매혹적으로 구축한 <초록밤>의 윤서진 감독, 추경엽 촬영감독을 만났다.

- <초록밤>은 어떻게 시작된 영화인지 궁금하다.

윤서진 6~7년 전에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를 쓰고 있었다. ‘이 가족은 왜 여행을 가는가’에 관해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글을 멈춘 상태였는데, 2017년에 외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굉장히 슬펐는데 친할아버지는 자주 뵌 적이 없어서인지 나조차 내 감정을 모르겠더라. 그렇게 두번의 양가적인 장례식장을 겪으면서 내 감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돌아가신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고,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초록밤>의 전체 구조를 떠올렸다.

- 추경엽 촬영감독과는 어떻게 협업하게 됐나.

윤서진 신우정 미술감독과 강길우 배우의 참여가 결정되고 나서, 평소 좋게 본 영화들의 리스트를 정리해봤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의 빛들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다 추경엽 촬영감독님이 작업한 것들이더라. 전혀 인연이 없던 터라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에 전화해 연락처를 여쭤봤다. 받은 메일 주소로 나와 내 영화 소개를 하면서 글을 보내드리고 싶은데 혹시 봐주실 수 있겠냐고 연락드렸다.

추경엽 한 문장, 한 문장 아주 예의 바른 메일이었다. (웃음) 작업 전에 감독의 취향, 지향점 같은 걸 미리 파악해두는 편인데 윤서진 감독님은 유학을 다녀오셨고 미술을 좋아하고, 영화의 시각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다른 작품보다 재밌게 작업할 수 있겠다고 직감했고, 시나리오도 누구나 자기 이야기라고 느낄 법한 일상적인 코드들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윤서진 촬영감독님의 요청으로 프리프로덕션 기간도 두달 정도로 길게 가졌다. 예술적인 표현이 중요한 작품인데 주어진 예산은 한정적이니 시간이라도 길게 가졌으면 하셨다.

추경엽 팬데믹 시기에 찍은 작품이라 ‘영화는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것인가, 영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던 때였다. 그래서 해치우듯 신을 찍는 게 아니라 날씨도 살피고, 찍은 분량도 피드백해가며 천천히 찍어보자고 말했다.

윤서진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스탭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걸 구현하는 게 아니라 모두의 작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걸 얻는 작업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다들 의견을 많이 내더라.

- 초록 하면 일반적으로 생명과 자연을 떠올리게 되는데 <초록밤>에선 필연적으로 초록을 죽음과 결부지어서 볼 수밖에 없다. 또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초록색 빛이 주요하게 활용된다. 초록을 활용하는 방식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윤서진 초반에 두 가지를 부탁드렸다. 영화 자체는 무겁지만 화면은 밝고 컬러풀했으면 좋겠다. 아주 밝은 환경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극단의 충격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시나리오 때부터 나무에 관한 묘사를 많이 넣었고 화면에도 자주 등장하길 바랐는데, 도중에 촬영감독님께서 밤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아이디어를 주셨다.

추경엽 <초록밤>은 현실 기반의 작품이지만 판타지적으로 그려지는 부분도 있다. 현실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부분에 초록색을 쓰면 현실에서 이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 초반 원형이 집에 돌아와 불은 끄는 순간 초록색 빛이 집 안으로 스며든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원형의 가족이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날까지 초록색 빛이 밤마다 쭉 펼쳐지게끔 했다. 기술적인 고민은 초록빛의 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였다. 어느 날 주차장에서 드물게도 초록색 등을 사용한 구역을 봤는데, 이거다 싶어 바로 사진을 찍고 레퍼런스로 삼았다. 길가의 가로등도 우리가 일일이 필터를 다 씌운 거다.

윤서진 영화 제목이 원래 ‘허공’이었다.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는데, 알고 보니 촬영감독님이 ‘초록밤’이라고 초반에 아이디어를 주셨다더라. 그때만 해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만들고 나니 초록이 딱 들어와서 제목을 바꿨다. 이 얘기만 하면 다들 진짜 잘 바꿨다고 한다. (웃음)

- 강길우 배우가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웠을 때, 밖에서 초록빛이 들어오는 그 장면은 굉장히 환상적으로 연출됐다. 연출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추경엽 시나리오 때부터 명확하게 있었던 장면이다. 다만 원형이 들어왔을 때 어떤 이상한 빛 조각이 떠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고 하셨었다.

윤서진 시나리오에는 ‘프리즘이 떠 있다’고 썼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그대로 암시하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추경엽 프리즘을 종류별로 몇개 사서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 그래서 아예 분위기를 바꿔서, 사람들이 급히 뛰쳐나간 것처럼 집 안의 불을 전부 켜두고 원형이 하나, 둘 끄게 했다. 그러다 집이 완전히 어두워진 순간 밖에서 초록빛이 스며드는 거다. 촬영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어둠 속에서 마치 동공이 열리는 것처럼 초록불이 집 안으로 밝게 들어오는 것처럼 구현한 거다. 혼자만의 휴식을 취하던 원형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깨어나는 신이지 않나. 자신만의 시간 안에 잠겨 있다는 환상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서 그렇게 표현해보았다.

- 카메라는 항상 인물들과 거리감을 둔다. 흔한 틸트나 패닝도 없고, 움직이더라도 아주 조금씩 천천히 움직인다. 어떤 의도가 담겼나.

추경엽 이 영화는 일반적인 경우처럼 내러티브를 차곡차곡 쌓아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이 각자 다르게 감상을 가져갈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시나리오의 매력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카메라는 멀리서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정말 천천히 조금씩 카메라를 움직이며 관객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끔 했다. 카메라 오퍼레이팅을 하지 않은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시간이 길어지니까 자연스럽게 인물 주변의 공간까지 같이 바라보게 되고, 사운드를 들으며 그다음을 생각하게 된다. 인물 외의 요소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했다.

윤서진 풀숏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처음부터 드렸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영화는 ‘보는 것’이기도 한데 요즘엔 너무 영화를 들으려고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익숙한 표현 방식은 아니지만 관객이 좀더 주의 깊게 장면들을 볼 수 있도록 의도했다.

추경엽 앵글이 넓다보니 집 어디를 비춰도 배우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끔 풀세팅을 해둬야 했는데 신유정 미술감독님이 정말 잘해주셨다. 세월의 흔적이 잘 드러나게끔 원형이네 집을 집중공략하신 거다. 장판도 중국에서 공수해오신 거다. <초록밤>은 지금까지 내가 작업한 작품 중 가장 회화적인 작품이다. 미술관에서 현대 사진을 관람하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하면서 굉장히 재밌는 작업이었다.

- 여러 시도를 꾀한 장면 중 가장 까다로웠던 신은 어떤 것인가.

윤서진 기억나는 게 너무 많지만, 장례식장에서 원형의 고모들이 싸우는 장면을 꼽겠다. 액션도 큰데 원테이크로 가야 해서 부담이 많았다. 어려운 신이라 아예 촬영 초반에 배치했다. 해도해도 오케이가 안 나니까 선배님들이 마지막으로 정말 딱 한번만 더 찍자고 온 힘을 다해 싸우셨고, 나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끝까지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추경엽 영화 초반에 야간 경비원 일을 마친 원형의 아빠가 퇴근하고 엄마는 고추를 널어두기 위해 나가는 신 있지 않나. 그 신은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컷이 안 넘어간다. (웃음) 그 속도와 태도가 앞으로 우리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공을 들였다.

- 인터뷰 초반에 영화에 대한 원론적인 고민을 거듭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초록밤>을 찍으며 기술적으로도, 기술 외적으로도 다양하게 도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고민과 도전의 결과물을 스크린에 걸고 나니 어떤가.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답을 찾은 것 같나.

윤서진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 정리가 된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어떤 작품을 쓸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느낀 건 영화의 품격에 관해 항상 고민해야겠다는 거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 태도, 이런 게 전부 영화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품격을 지키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추경엽 촬영 당시에 했던 생각들이 내게 굉장히 중요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충분히 생각하고 스탭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고, 그랬더니 스탭들이 각자의 의견을 펼치고, 각자의 이유를 갖고 노력하며 현장에 임했다. 그런 노력이 없었으면 지금의 결과물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영화를 몇편이나 만들겠나. 그 몇 안되는 작품 안에서 이렇게 좋은 현장을 만났고 즐거운 추억을 얻었다는 게 영화하는 사람 입장에선 큰 행복이다. <초록밤>의 독특한 지점들을 관객이 어떻게 봐주실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의 도전과 실험이 관객에게 여러 의미로 가닿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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