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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콘텐츠가 뜬다] ⑧팬들이 대본 쓰면, '내 성우'가 연기한다... 오디오 콘텐츠 팬덤의 세계

“하나, 둘, 셋, 넷~ 열아홉. 하나만 더요. 회원님 하실 수 있어요. (중략) 그럼 한 세트 더 할까요?” 헬스장에서 PT를 받는 것도 아니건만 누워서 중저음의 잘생긴 목소리를 가진 강사의 운동 독려 음성을 듣고 있다. 후압후압, 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잘생긴 목소리 때문에 심장이 가빠오네? 목소리에 무슨 생김새가 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는 말씀이다. 모든 목소리에는 각각의 생김새가 있다. 성우 팬이 특별히 청각에 예민해서가 아니라 음성 콘텐츠를 다양하게 발굴하고 또 즐기다보면 알게 되는 신세계다. 앞서 소개한 것은 드라마 CD 제작사 오디오코믹스의 ‘스낵보이스’라는 콘텐츠로, 제목은 ‘회원님, 오늘 운동하셨어요?’다. 운동하기 싫어 꾀부리는 회원님과 밀당하는 PT 강사 컨셉 음성을 버스에서 들으며 생각한다. 마스크가 있어서 다행이야.

팬들이 직접 콘텐츠를 의뢰하고 생산하는 맵스와 올보이스(위부터).

오디오코믹스 사이트에서 결제 후 들을 수 있는 스낵보이스는 성우와 콘텐츠마다 다른 가격의 코인(사이트 내 화폐)이 산정된다. 그외의 낭독 음성 콘텐츠 제목은 이러하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명상의 시간’, ‘성 미카엘 대천사 기도문’, ‘세종실록’ 등등. 설정에 따라 성우들은 위엄 가득한 왕이 되었다 귀여운 연하남이 되기도 하고, 때론 왜 이렇게 늦게 귀가하냐며 타박하는 7년 사귄 남자 친구가 된다. 아이돌 덕질과 달리 성우 덕질은 ‘떡밥’이 적기 때문에 오디오 채널에서 성우 팬덤을 대상으로 콘텐츠를 제작하지 않을 경우 팬들이 직접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중 맵스(mabs)가 대표적인 오디오 콘텐츠 제작 사이트다. 맵스는 성우 커뮤니티나 트위터에서 인원을 모으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총대(주최자)가 정한 인원수가 채워지면 곧바로 대본을 모집한다. 좋아하는 성우의 사이코패스 연기나 달콤한 로맨스 연기가 듣고 싶을 경우 팬들이 그런 캐릭터가 직접 등장하는 대본을 작성해 투고한다. 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대본으로 해당 성우에게 의뢰가 들어가고 성우가 수락하면 맵스가 성사된다. 모금이 완료된 후엔 전문 PD들이 직접 녹음과 편집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총대가 최종 음성 파일을 검수한 뒤 참여자들의 메일로 보낸다. 비슷한 형식의 채널 ‘올보이스’에선 성우의 샘플 파일을 미리 들을 수 있으며 더 짧은 보이스 음성도 의뢰 가능하다. 팬들은 “아팠어? 왜 전화를 안 했어. 걱정되잖아”와 같은 가상 연애 컨셉의 단문 음성부터 “문 앞에 놔주고 가세요”와 같은 안전 음성을 요청하기도 하는데, 이는 집에 택배나 배달이 왔을 경우 1인 가구 여성이 틀어놓기 좋은 음성 파일이다.

일반적인 오디오 콘텐츠 소비자들이 콘텐츠의 내용을 보고 지갑을 연다면, 성우 팬들은 좋아하는 목소리에 따라 콘텐츠를 선택하기도 한다. 오디오북을 책에 따라 듣는 게 아니라 어떤 성우가 녹음했는지 성우 이름으로 검색해 결제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좋아하는 성우님이 데뷔 20주년이 넘은, ‘나보다 나이 많은 내 새끼’라 불리는 분인지라 녹음한 오디오북이 많지 않다. 그중 내가 구매한 오디오북은 <진흥왕>과 <온조왕>인데 진흥왕의 일대기 따위 아무 관심도 없지만 그저 그의 목소리를 길게 듣고 싶어서였다. 성우 팬들은 그의 연기와 목소리를 오래 듣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외화나 애니메이션 더빙, 광고 녹음, 오디오북 및 다큐멘터리 내레이션과 같이 성우들의 기존 활동 반경 내 콘텐츠를 찾아 듣는 것을 넘어 듣고 싶은 연기를 ‘내 성우’에게 직접 의뢰하는 제작자가 된다. 또한 팬미팅, 사인회와 같은 오프라인 행사와 생일 카페, 지하철 전광판 광고 등을 주최하기도 한다. 내 성우의 오디오 드라마를 듣고 이미 천국을 다녀왔으며, 음성 연기 부문의 에미상이 있다면 내 성우에게 주연상 트로피를 몰아주고 싶은 사람으로서 이 좁고도 깊은 덕질을 오래오래 맛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