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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오늘은 SF] 깊고 깊은 토탈 리콜

<토탈 리콜>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의 걸작을 꼽으라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로 <토탈 리콜>(1990)이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기억 조작 기술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그 기술을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상품으로 판매하는 미래 사회다. 주인공은 그 와중에 이상한 음모에 휘말려서 지구와 화성에 걸쳐 모험을 벌이게 되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토탈 리콜>은 21세기에 나온 리메이크작보다 원작이 훨씬 더 좋은 평을 받으며 흥행했는데, 그 때문에 <로보캅>과 <스타쉽 트루퍼스>로 명성을 떨친 폴 버호벤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함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전성기 때 주연을 맡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중에서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들은 어디까지가 가상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혼동되는 이야기를 다룰 때가 많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껏 가상현실을 다루는 SF에서는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장자>와 연결해서 해설하는 평론가는 이제 진부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오죽하면 SF 작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듀나는 한 저서에서 가상현실을 다룬 SF를 평하면서 평론가가 <장자>에 나오는 호접몽을 한 문장 이상 언급하면 그 평론가를 뭘 잘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해도 좋다는 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넷과 SNS 활동의 비중이 커진 요즘에는 비슷한 주제를 약간 다른 방향에서 다루는 이야기도 여럿 나와 있다. 현실에서 만나는 친구보다 SNS를 통해 댓글을 주고받는 사람이 더 많고, 현실에서 즐기는 놀이보다 온라인 게임으로 즐기는 시간이 더 긴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흔하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문자 메시지나 SNS 사진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비중도 높다.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들보다 정보를 다루는 인터넷 서비스 회사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은 21세기의 상식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현실 세계보다 가상 세계가 정말로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더군다나 진짜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풍경을 입체 영상으로 보여주고, 첨단기술로 신경을 자극해서 촉감이나 온도까지 느끼게 해주는 가상현실 장치가 있다면 그 가상현실이 오히려 현실보다 더 장점이 많고, 더 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토탈 리콜>은 이런 생각을 한 단계 더 깊이 뚫고 나간다. 이 영화 속 가상현실은 진짜 같은 체험을 굳이 전달해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 영화 속 세상에서 가상현실로 무엇인가를 즐기고 싶다고 하면 체험은 처음부터 건너뛰어버리고, 그 체험을 마친 후의 기억만 뇌에 심어주기 때문이다. 메타버스라는 말로 선전하는 요즘의 가상현실이라면 화성을 여행하기 위해 헬멧 같은 것을 쓰고 손에 특수장갑을 낀 채로 화성 풍경을 처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에 접속하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그 속에서 사용자는 프로그램이 표현해주는 화성을 돌아다니며 원하는 것을 보고, 원하는 곳에 가볼 것이다. 사용자가 어떤 행동을 하면 거기에 컴퓨터 프로그램이 반응하여 사용자가 진짜 화성에서 보고 듣고 느낄 법한 내용을 헬멧과 장갑에 전달해준다. 사용자는 그 컴퓨터 프로그램에 어떤 행동을 해주고 그 결과가 돌아오는 느낌을 즐기면서 실제 화성 여행과 비슷한 체험을 한다. 30여년 전에 나온 영화 <토탈 리콜>에서는 이런 귀찮은 방식을 쓰지 않는다. 가상현실로 화성을 체험하기 위해 시술을 받으러 가면 그냥 적당한 약물과 전기장치를 이용해서 잠시 두뇌를 좀 조작해준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다. 이때 조작을 통해 두뇌에 끼워넣은 내용은 즐거운 화성 체험을 끝낸 후에 생기는 기억이다. 사실 이렇게 해서는 마음껏 화성을 탐사하는 온갖 가능성을 자유롭게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토탈 리콜>에서 화성 체험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정해놓은 똑같은 경험 한 가지만을 즐길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왜냐하면 뇌 속에 들어온 기억에 “나는 자유롭게 마음껏 화성을 즐겼다”라는 그 기억마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진짜가 아닌데 그래도 과연 그곳에서 얻는 쾌락의 순간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토탈 리콜> 바닥까지 뚫고 내려가 다시 묻는다. 아예 쾌락의 순간조차도 없었으니까.

전체 내용을 보면 <토탈 리콜>은 우리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판단할 때 과연 경험이나 감각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느냐 하는 철학의 오래된 의문에서부터, 삶의 의미와 진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 사람이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 영화가 정말 사랑스러운 점은 그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기관단총으로 악당 무리와 결투를 벌이고 세상이 펑펑 터져나가고 아슬아슬한 순간 외계인의 기술을 이용해 살아남는 짜릿한 활극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알 수 없는 풍경과 심각하고 알쏭달쏭한 대사들이 천천히 이어지는 기묘한 예술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배우들 역시 다들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나는 이 영화에서 배우 샤론 스톤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해 한동안 샤론 스톤이 출연한 모든 영화들을 다 찾아서 보려고 애쓸 정도였다. 볼거리가 많은 영화라 처음 볼 때는 기억에 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음악조차도 대단히 듣기 좋다. 긴박하게 펼쳐지는 영화 내용과 더없이 잘 어우러진다. 그외에도 <토탈 리콜> 속에는 군데군데 SF영화의 재미를 근사하게 끌어올리는 내용이 넉넉하다. 대조될 만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요즘 영화들 중에는 지구가 오염돼 부유한 사람들은 우주에 자기들만의 인공 도시를 만들어 낙원처럼 꾸며놓고 산다는 소재를 다루는 것들이 여러 편 있다. 아마도 천상 세계는 놀라운 곳이라는 옛 신화, 전설의 상징을 SF로 쉽게 옮겨오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재를 살리기 위해 이야기가 억지스러워질 때가 많다. 지구가 아무리 오염되더라도 우주보다는 사람 살기에 더 낫다. 지구의 물과 공기가 오염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주에는 아예 물이나 공기 자체가 없지 않은가. 신화 속의 환상과 달리 우주에 천상 세계라는 곳은 없으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지구뿐이다. 그에 비하면 <토탈 리콜> 속 우주 저편 화성 세계는 생존하기 어려운 척박하고 괴로운 곳이며, 사회의 약자들이 힘겹게 살면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곳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훨씬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며, 이 역시 <토탈 리콜>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쉽게 연결되고 훨씬 부드럽게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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