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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미술관과 극장, 교환의 조건들
김예솔비 2022-12-08

영화의 확장, 영화와 미술의 경계 없음이라는 현상은 우리 앞에 어떤 이유로 도달했는가

김희천 <탱크>

극장의 조건들을 떠올려보자. 빛, 어둠, 시간 약속, 정해진 자리, 스크린, 스크린의 가장자리, 덜 채워진 객석, 집중하는 이의 옆얼굴 혹은 뒤통수, 비상구 사인이 내뿜는 희미한 빛….

이렇게 극장의 조건들을 아주 작은 단위까지 고심하다 보면 기이하게도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떠오른다. 한 전시장에서의 기억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긴 긴 어둠이 진입을 막아선다. 비틀거리면서 한참 걸어가다 보면 스크린과 몇개의 빈백이 놓인 구간이 뒤늦게 나타난다. 2019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된 김희천의 <탱크>를 보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걸음의 경로다. 사실상 이렇게 짙고 긴 어둠을 관람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극장을 드나드는 이들에게는 낯선 일이 아니다. 극장에서 우리는 시간을 약속하고 어둠을 합의한다.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이미 어둠은 극장에 도착해버리고, 관객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차재민 <네임리스 신드롬>

전시장과 극장 사이

그러므로 <탱크>로 향하는 걸음걸이는 극장의 어둠을 이상한 방식으로 연상시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걸음걸이는 극장에 늦게 도착하거나 너무 빨리 일어난 이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그러나 극장의 조건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어둠을 더듬으며 스크린의 빛을 좇는 관객의 감각이 단순히 관람의 조건일 뿐 아니라 <탱크>에서 특수한 시뮬레이션 장치로 심해의 어둠을 헤치고 잠수하는 주인공의 감각과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이 어둠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탱크>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루프되는 영상 앞에서 관객은 언제나 늦거나 너무 빨리 도착한다. <탱크>의 진입에 놓인 어둠은 극장의 조건들을 유난스럽게 인식하게 하며, 극장 환경에 익숙해진 몸의 감각을 새롭게 해석한다. 극장의 조건들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해놓고 <탱크>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바로 그러한 조건들이 극장 바깥으로 이동했을 때 비로소 날카롭게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탱크>의 전시장은 극장은 아니지만, 여전히 극장의 조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미술관은 이러한 조건들을 낯설게 내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장소다. 동시대 미술과 영화가 종종 서로를 침범하면서 영상 설치 작품과 영화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처럼 미술과 영화 각 분야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는 작가-감독의 예시뿐 아니라 페드로 코스타, 샹탈 아커만, 필리프 가렐의 영화들, 그리고 차이밍량의 VR영화,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극장이 아닌 미술관이나 전시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지난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상영된 강상우 감독의 단편영화 <Forest Neighbor>도 이 사례에 겹쳐볼 수 있다. 한편 미술관에서 영상 설치 작업으로 상영된 작품들을 각종 영화제나 시네마테크, 공동체 상영의 기획전이라는 형태로 극장에서 마주치는 일 또한 몹시 익숙해진 풍경이다. 몇해 사이 각종 영화제에서 마주칠 수 있었던 홍민키의 <들랑날랑 혼삿길>, 정여름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과 차기작 <긴 복도>,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연작, 차재민의 <네임리스 신드롬>, 송주원의 댄스필름 연작 <풍정.각>, 홍진훤의 <멜팅 아이스크림>은 모두 영화제 상영 이전 혹은 이후에 전시장에서 영상 설치 형태로 전시되었다. 심지어 지난 인디포럼 월례비행 <그림자, 탐정, 기계: 차재민 작가전>에서는 9개의 영상 작업이 하나의 러닝타임으로 묶여 컴컴한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제 상영과 스크리닝 설치를 활발히 왕복하는 백종관, 오민욱, 정재훈(워킹 아하)의 작업들은 또 어떠한가. 한편 여전히 영화의 장에 있지만 어쩐지 ‘전시장’에서 틀 법한 영화처럼 보이는 작업들이 있는가 하면, 미술관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영상 설치 작품들 중에서는 매우 ‘영화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들도 적지 않다. 미술과 영화는 거주지를 교차하며 물리적으로 섞이지 않더라도 이미 그 교환의 흔적을 작품 안에 기입하고 있다.

이렇게 나열된 사례들을 통해 영화의 확장, 영화와 미술의 경계 없음이라는 변화를 주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유운성 평론가는 이에 대해 ‘위기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영화와 미술 두 영역이 만나 새로운 미학이 창조되고 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개의 위기가 만나 격렬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광경으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단 장르와 매체의 경계뿐 아니라 그 모든 교환이 이루어지는 미술관과 극장이라는 ‘장소’와 그 ‘조건들’을 유심히 보아야 하는 이유다.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극장과 미술관 사이의 절충은 존재하는가

신은실 평론가는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상호 교통의 풍경이 들어서게 된 시기를 박찬경의 <신도안>(2009)이 국내 영화제들에 소개되고, 아트선재센터에서 플랫폼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전이 열린 2009~10년경으로 짐작한다. 플랫폼2010 전시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과 하룬 파로키의 작품을 소개할 뿐 아니라, 영상 설치 작업을 하는 신구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화이트큐브가 아닌 어두컴컴한 ‘블랙박스’에서 상영했다. 흥미로운 것은 전시를 설명하는 기획의 말이다. 기획자는 전시장에 블랙박스를 설치한 경위에 대해, 다양한 비디오 아트 영상 작업들이 전시 공간에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관객이 “관람 시간, 시선의 위치 등 관람 경험에 있어서 자유를 얻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관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미술관과 극장을 오가는 관객의 곤경을 압축하고 있는 문장이며, 대체로 정확하다. 비약을 무릅쓰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극장은 자유가 없고 미술관은 몰입이 없다. 미술관은 극장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위기를 물리치기 위해 극장의 속성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극장은 미술관과 반대급부에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미술관과 극장 사이를 왕복하면서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의 몰입을 가능케 하는 환경 자체로 흡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장의 조건들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어둠과 빛, 시간 약속이라는 조건뿐 아니라 그러한 관람이 촉발하는 정신적 활동까지 포괄하여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과 영화의 부단한 엮임이 자아내는 소용돌이의 풍경은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의존하는 정신의 풍경-자유 없음과 몰입이라는 조건 자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기회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영화의 자리에서 가능한 질문들. 화이트큐브의 내부에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것만이 극장과 미술관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절충인가? 자유와 몰입은 서로 반대되는 관람 방식인가? 자유로움 한가운데에서 몰입을 찾고, 몰입의 경험 속에서 자유로움을 발견하는 관람은 불가능한 것일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대체 어떤 활동일까? 몰입과 자유라는 이분법은 미술관이 극장의 어둠을 빌리기 위해 덧씌운 혐의는 아닐까?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영화와 나 사이의) 거리에 의해 최면당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중얼거림은 동시대의 극장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일까? 다시,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보는가? 질문들의 총체를 끌어안고 극장과 미술관의 가장자리로 가라앉기.

박찬경 <신도안>

극장에서 전시장으로, 전시장에서 극장으로 이동하는 작품들

이번 기획 기사에서는 영화의 위기, 혹은 영상 매체의 저변으로 영화가 확장되고 있다는 익숙한 확인보다도 극장의 조건들을 유난스레 사유하는 계기로 삼는 것을 제안한다. 최근 미술관에서 영화를 불러들이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다. 줄곧 시네아스트들을 활발히 소환해왔던 국립현대미술관의 필름앤비디오가 이번에는 ‘영화로, 영화를 쓰다’라는 주제로 글쓰기와 영화 만들기의 불가분을 드러내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수전 손태그, 포루그 파로흐자드, 차학경의 영상 작업을 상영한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뒤라스를 제외하고는 영화의 장에서 마주치기 힘들었던 이름들이다. 임흥순과 오메르 파스트의 타이틀 매치전이 열리고 있는 북서울미술관의 전시 또한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이름을 미술관으로 방류하는 시도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준비 중인 <요나스 메카스 + 백남준: To All Dear Friends,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에게>전은 영화와 비디오 아트의 중개지로서의 미술관이라는 입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더이상 낯선 풍경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인접한 시기에 도착한 비슷한 움직임들은 그 자체로 꽤나 의미심장한 신호처럼 보인다. 이 신호를 경유지 삼아 우리는 여전히 극장에 앉아 있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숙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본다는 단순한 행위를 복잡하게 사유해보는 계기로 삼아보고자 한다.

한편, 반대의 사례도 있다. 홍진훤의 <멜팅 아이스크림>은 서울독립영화제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그보다 먼저 동명의 제목인 전시에서 스크리닝되었다. 앞서 사례로 들었듯 전시장에서 극장의 자리로 옮겨간 설치 작업이 <멜팅 아이스크림>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례로 든 작업들이 대체로 실험과 변주가 자유로운 단편영화에 해당하는 반면, <멜팅 아이스크림>은 영화의 관습과 인력이 좀더 강하게 적용되는 장편영화라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경우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전시장에서 60분 길이로 루프되어 상영되었지만, 극장 상영 버전은 최종적으로 10분이 늘어난 70분 길이의 영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장편치고는 ‘짧다’는 평을 듣는다. 하나의 영상 작업이 미술관에서 극장으로 이동할 때 끼어드는 수상한 절차와 조건들을 이보다도 잘 보여주는 해프닝이 있을까.

홍진훤 작가는 “극장이라는 공간은 도대체 어떤 공간이길래”라고 물으며 극장의 폐쇄적인 관람 환경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작가는 극장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을 근심한다. 이는 이미지를 매개로 특권적인 역사의 복원에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고자 했던 <멜팅 아이스크림>의 저항적 몸짓을 떠올려보면 더욱 신중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극장의 선형적 질서 속에서 우리는 그 불편함을 알아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불편함으로부터 이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저항의 몸짓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극장의 대답을 기다린다.

홍진훤 <멜팅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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