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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더 글로리’, 권력에의 욕망과 복수의 카타르시스
임수연 2023-01-12

<더 글로리>를 통해 본 김은숙 드라마의 성공 법칙

<더 글로리>에서 SNS는 학교 폭력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이 자신의 복수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다. 단지 집단 폭력의 주동자 박연진(임지연)이 잘나가는 건설회사 대표와 결혼을 했다든지 그의 심부름을 하던 최혜정(차주영)이 스튜어디스가 됐다는 사실을 동은의 옛 공장 동료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두고 실적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브랜드인지, 늘 들고 다니는 가방이 아닌 몇번 입고 말 니트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는지 여부를 따지며 모태 부자와 아닌 자들을 구분하는 이들이 득실한 시대다. “꿈이란 걸 갖는 사람들이 꿈을 이루면 돈 주고 부리는” 연진은 그저 “적당히 안 짜치는 직업이 필요”한 상류층이고, 그에게 골프장을 상속받은 전재준(박성훈)은 같이 노는 상대로 연진의 부모도 만족시킬 수 있지만 결혼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최혜정은 고등학생 때부터 그들의 심부름을 도맡으며 무시당하지만 호화로운 소비를 전시할 SNS용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그 수모를 감내해야 한다. 박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들의 SNS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들 사이의 권력 구조 또한 알 수 있다.

이는 김은숙 작가의 세계에서 가장 다층적으로 분석된 권력 집단이다. <파리의 연인>에서 묘사된 재벌가 집단은 강태영(김정은)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이분할 수 있다. 드라마 초반 몸을 파는 창녀로 오인받고 한기주(박신양)의 아버지에게 결혼 빼고는 다 해도 되는, 어쩌면 출산한 아이도 키워줄 수 있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 강태영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지만 정작 콜걸이었던 홀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의 욕망은 거세된 순결한 여자다. <연인> 3부작을 마치고 <온에어>와 <시티홀>이라는 돌발을 거쳐 돌아온 <시크릿 가든>은 상류층의 계급의식을 감추지 않는 남자주인공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비튼다. 김주원(현빈)은 첫회에서 이미 길라임(하지원)에게 반했다. 이 속도는 남자와 여자가 티격태격하다가 마음을 확인하고 8회 혹은 10회쯤 키스를 한다는 K드라마 공식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빠르다. 대신 드라마는, 백마 탄 왕자가 길라임을 대하는 태도는 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윤리와 무관하지 않다며 “조용히 있다가 인어공주처럼 거품이 되어 사라져라”라는 독설로 쐐기를 박는다. <파리의 연인>에서 결혼은 불가능하니 숨은 애인으로 만족하라는 폭언을 쏟아낸 건 기주의 아빠였지만, <시크릿 가든>에서는 남자주인공의 입에서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가 논쟁적인 결말로 인해 여자를 위해 부를 포기하고 빈털터리가 됐는지 끝이 모호했던 것처럼, <시크릿 가든>은 상위 계급자가 대신 물거품이 됨으로써 사랑의 결실을 맺게끔 유도하지 않는다. 김은숙의 드라마는 계급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권력에 기대는, 결국 힘에 매혹되는 욕망을 감추지 못하곤 했다. 한기주는 가난한 여성을 무시하는 ‘나쁜 재벌’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착한 재벌’이다. 영혼 체인지는 <시크릿 가든>에서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는 판타지적 장치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모든 장벽을 허물어 급기야 식물인간 상태가 된 연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까지 내어줄 수 있다는 공상. 목숨뿐만 아니라 한번에 계층 이동에 성공해 상류사회에 편입시켜줄 수 있다는 헌신. 요컨대 김은숙의 세계는 늘 계급 인식이 도사리지만 가난한 여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선하거나 여자주인공으로 인해 선하게 변할 수 있는 남성 권력자다.

확장되고 진화된 남성 숭배

김은숙 월드의 남성 숭배는 <태양의 후예>에 이르러 유시진(송중기)이라는 전쟁 속 슈퍼히어로, <도깨비>의 김신(공유)과 같은 신화 속 존재, <더 킹: 영원의 군주>가 배경으로 삼은 가상의 입헌군주제 국가 황제 김곤(이민호)처럼 탈인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들의 진화는 현실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여성 캐릭터가 선명해지면서 판타지의 크기 역시 키워나간다. <파리의 연인>의 강태영은 “이 꼴을 하고서 어떻게 그래요? 내 자존심 세우자고 당신 망신 줄 수 없잖아요”라고 울며 고통을 감내하는 여자였지만, 길라임은 김주원의 부모에게 “아드님을 내게 달라”고 허락을 구하는 전복을 꾀하고 <도깨비>의 은탁(김고은)은 노골적으로 도깨비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부탁하며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송혜교)은 병원 이사장의 스폰서 제안을 거절했다가 우르크로 강제 파견된다. 이는 일견 김은숙 월드의 여성들이 점점 구체적인 욕망과 신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파리의 연인>과 다른 형태의 판타지를 선보이는 과정에서 탄생한 변주에 가깝다. 여성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성희롱을 간과하지 않으며 주체적인 여성상에 대한 트렌드 역시 반영하지만 그때 그들은 완벽한 존재를 만나 관계를 고민하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 젠더와 계급, 다양한 층위에서 여성들이 마주하는 구체적인 시련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극복되고, 애당초 가시화됐던 구조적 문제는 맥락을 잃는다. 과거 신데렐라적 욕망을 이끌었던 김은숙 월드의 남성들은 근작으로 올수록 현실적인 고난을 겨냥하되 해결책을 깊이 고민하진 않는 방식으로 판타지를 키워나간다.

김은숙 작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동떨어진 작품처럼 보이는 <시티홀>에서 약자의 눈높이에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주시청 10급 공무원 신미래(김선아)는 우여곡절 끝에 인주시장에 당선된다. 그리고 마지막회에서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는 것은 신미래가 아닌, 그와 계급 및 정치 견해의 차이로 충돌하다 함께 공조했던 인주시청 부시장 조국(차승원)이다.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고, 빈부에 상관없이 고귀한 참정권을 갖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논하는 클라이맥스의 연설 역시 그의 몫이다. <시티홀>은 신미래의 입으로 정치와 행정, 현실적인 개혁의 정도를 묻지만 그 과정에는 이상주의자를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과 유연함을 가진 현실적 엘리트가 필요하다. 원형적인 신데렐라 판타지였던 <파리의 연인>이든 착한 정치 드라마였던 <시티홀>이든 김은숙의 드라마는 계급 의식을 표출하고 약자의 생존 투쟁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됐다. 하지만 진보와 구원의 가능성은 언제나 근사한 상류층 남성의 각성에서 시작되며, ‘김은숙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배우는 무조건 뜬다’라는 공식에서 알 수 있듯 보는 이 역시 그들의 성장에 매혹되기를 장려한다.

<더글로리>의 가능성과 한계

다시 <더 글로리>로 돌아와서, 극중 문동은과 이성적 텐션을 만들게끔 의도된 남자는 둘이다. 동은에게 바둑을 가르쳐주고 연애 감정을 숨기지 않는 병원장 아들 주여정(이도현) 그리고 연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이다. 하지만 지난해 12월30일 공개된 시즌1에서 대체로 문동은을 돕는 것은 가정 폭력 피해자 강현남(염혜란)이다. 그는 타고난 공부 머리와 끈기로 교대에 합격하고 과외로 돈을 벌 수 있었던 동은보다도 계급 이동의 가능성이 막혀 있는 존재다. 김은숙 작가의 세계에서 약자들의 감동적인 연대가 이처럼 전면에 나선 적이 또 있었던가? 더군다나 강도 높은 학교 폭력 묘사로 첫 에피소드를 채운 <더 글로리>는 상류층에 대한 숭배의 여지를 한톨도 남겨두지 않게끔 극을 세팅한 후 본론에 들어간다.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동은의 말은 주여정이 극에서 맡은 바와 작가가 부여한 롤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그가 의사로 설정된 것은 진짜 ‘칼’을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이며 개인의 복수가 끝난 후 그가 감내할 낙차는 동은의 그것 이상이 될 수 있다. 대신 김은숙 월드의 클리셰에 가까운 역할을 도맡는 존재는 하도영이다. 극중 동은은 도영을 욕망하지 않고 두 사람이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기원에서 두 사람이 스칠 때 이미지는 노골적으로 <화양연화>를 인용한다. 동은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나긴 복수가 끝났을 때 연진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의 시작점엔 도영의 흔들림이 있었다. 심지어 연진이 남편을 진짜 사랑했다고 뒤늦게 깨닫기까지 한다면, 시청자가 느낄 카타르시스에는 계급 최상위 포식자의 인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문동은은 자신이 연진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딸 예솔의 교실을 떠올렸다. 20여년 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재민(조인성)은 재벌이지만, 인욱(소지섭)은 가난한 대신 재민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물로 묘사됐다. 인욱과 같은 방식으로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개천 용’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가진 자들이 더 다양한 영역에서 우위에 서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SNS 사진을 토대로 부자의 유형을 나누는 시대의 신분은 더욱 세밀한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연진은 충동적이고 종종 상스러운 재준이 아닌, 건설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과 진지하게 바둑을 즐기는 취향까지 갖춘 도영과 결혼했다. 그저 돈만 많으면 최상위의 귀족이 될 수 없다. 귀족의 다양한 층위는 그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학을 만들고, 그중에는 이미지 포장을 계급 상승의 기회로 삼아 하녀가 되기를 자처하는 혜정과 같은 인물도 있다. 상류층일수록 초등학교 교사에게 신경 쓰고 적극적으로 사교육을 알아볼 여력이 남을 가능성이 높다. 동은은 시대의 풍경이 만든 상류층의 약점을 간파한 여자다.

문동은의 복수는 십수년에 걸친 계급 분석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된다. 그 과정에서 <더 글로리>는 가해 집단의 권력 구조를 좀더 촘촘하게 펼쳐놓는 데 성공하지만, 복수의 카타르시스에 상류층에의 동경이 완전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계급적 한계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는 3월 공개 예정인 시즌2에서 동은과 현남 그리고 여정의 연대가 찝찝하지 않게 마무리된다 할지라도 잔재할 한계일 것이다. 때문에 <더 글로리>는 김은숙의 필모그래피에서 그의 유구한 한계를 넘어서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김은숙의 드라마는 늘 상충된 욕망을 동인 삼아왔다. 계급 문제를 현실적으로 드러내되 계급 상승의 욕망을 우회 혹은 드러내는 모순은 그의 드라마가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근간이 됐다. 정치적 모순은 덜어내면서 그의 성공 법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것, 레거시 미디어를 떠난 김은숙이 여전히 새로운 플랫폼에서도 저력을 증명해낼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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