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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화이트 노이즈’, 비극이지만 희극에 가까운
김성찬 2023-01-25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일까? 영화를 보고서 그간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고수하던 노아 바움백 감독이 돈 드릴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유가 궁금했다.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건강을 위협하는 재난을 배경으로 하고 공황에 빠진 군중의 좌충우돌을 담은 원작이 떠올랐을 수 있다. 또 유사한 시기 발달한 인터넷 기술에 따른 소셜 미디어의 확장과 함께 극단적인 우경화와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태가 원작이 묘사한 히틀러와 우중에 관한 내용을 생각나게 했을 수도 있다. 감독의 관심사인 부부나 가족의 풍경을 그린다는 점도 매력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특히 마지막 추정은,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와 그 사이에서 점증하는 감정을 포획한 블로킹으로 부부와 가족의 심정적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이 이번 작품에도 어김없이 이어진 데서 더욱 심증을 굳히게 한다. 다만 이러한 블로킹과 편집이 영화의 스펙터클과 관계한다는 점이 새롭게 눈에 띈다.

스펙터클이 관념에서 경험으로 내려오면

두 시퀀스를 예로 들어보자. 첫 번째는 히틀러학 전공 교수인 잭(애덤 드라이버)이 앨비스학의 창설을 꾀하는 머레이 교수(돈 치들)의 부탁으로 그와 합동 강의를 하는 장면이다. 원형의 강의실에서 히틀러와 앨비스의 모자 관계의 유사성을 논하는 두 교수의 강의는 주거니 받거니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는 식으로 이뤄진다. 잭과 머레이는 마치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과장된 목소리와 움직임으로 강의를 펼쳐나가며 강의실의 열기를 빠르게 끌어올린다. 또 이 장면은 유독가스 공중유출 사건을 일으킬 기차와 트럭의 충돌 장면과 교차 편집돼 긴장감을 극대치로 올린 뒤 해소한다. 두 번째는 잭의 아내 바벳(그레타 거윅)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려 잭 몰래 ‘다일라’라는 신약 실험에 참여하면서 신약 개발 프로젝트 매니저 미스터 그레이와 낡은 모텔에서 밀회를 나눈 일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구성은 전작 <결혼 이야기>에서 많은 이들의 상찬을 이끌어낸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의 언쟁 장면들과 유사하다. 이런 장면들은 대화가 교차하는 와중에 감정이 고양된 후 터지다 못해 다 주워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흘러 화면을 지배하고 관객의 마음을 움켜쥔 뒤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번에는 고양감이 영화 후반부 잭이 미스터 그레이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일의 폭력을 유발하는 데 쓰이도록 잠시 잠복해 있다는 점만 다르다.

여기서 두 시퀀스로 말미암은, 재난과 폭력의 스펙터클이 보인 위치 변경을 주목해야 한다. 아직 스펙터클은 재난과 폭력으로 세분화하기 힘든 불분명한 형상을 한 채 잭의 머릿속에 있다. 원작과 영화의 설명에 동의한다면 죽음 충동에 이른 군중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내세워 재난과 폭력을 자초한다. 잭은 이 광경이 주었던 불온한 매혹을 연구하고 강의 형식으로 향유한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그에게 재난과 폭력은 실제 생활에 물리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안전한 놀이의 대상이다. 그러나 머릿속 재난과 폭력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문제가 된다. 합동 강의 후 벌어진 유독가스 공중유출이라는 재난에 잭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가족 모두가 위험을 느끼고 대피를 서두르는 와중에도 잭은 심각한 일이 아니라며 저녁 식사 자리에서 굼뜨게 일어난다. 더욱이 가족 중 유일하게 유독가스에 노출돼 예정된 죽음을 부여받는다. 또 재난은 잭의 활약이나 도움으로 종식되는 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며칠 더 보호 캠프에 머무는 것으로 잊힌다.

미스터 그레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폭력은 어떠한가. 남성은 질투와 폭력으로 사고를 치는 존재라고 말한 바벳의 경고와 우려를 잭은 그대로 따른다. 학생들 앞에서 지적 총명함을 뽐내던 위인에게 기대할 법한 인내와 합리성은 간데없이, 잭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바벳을 탐하려는 미스터 그레이를 겨냥한 적개심에 사로잡힌다. 그는 히틀러와 우중이 주는 불순한 매혹을 안전거리를 두고 적절히 즐기며 사회 지도층의 지위를 누렸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맞닥뜨린 복수와 위해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되레 감화한 채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이 벌인 폭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을 미스터 그레이에게 넘기고 그를 황급히 병원에 데려간다. 요컨대 감독은 이전부터 보여준 자신의 장기를, 관념에서 경험의 층위로 자리를 옮긴 스펙터클 앞에 선 인물의 행동 양식을 관찰하도록 안내하는 데 활용한다.

무적의 희극

지금까지라면 영화를 관통하는 분위기가 굉장히 시니컬하거나 풍자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유독가스 공중유출이라는 재난이 일정 부분 폭력의 힘을 품고, 권총 발사의 폭력은 인물의 심리적 재난이 투여돼 있어 이중으로 무거운 소재임에도 영화는 기이한 낙관에 휩싸여 있다. 기차와 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져 사람들이 피난 행렬을 이루고 다치거나 죽는 광경이 펼쳐져도 인물들은 이상하리만치 고답적인 말만 늘어놓거나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바벳이 스스로 밝힌, 외도라는 무분별한 일을 벌여도 잭과 바벳 사이의 갈등은 심화하지 않는 데다 여타 사건을 별일 아닌 듯 용인하는 정황이 지속된다. 몇몇 지점은 현대 문명에 관한 성찰을 유도하지만 충분히 숙고할 여유를 주지 못하고 여러 이슈를 대충 훑고 지나가 폐부를 찌를 만큼의 각성에 닿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영화를 시작할 때 이미 관객에게 암시한 사항이라 할 만하다. 작품은 미국영화에서 나타난 자동차 충돌 장면의 함의를 말하는 머레이의 강의로 개시한다. 그는 충돌 장면이 위험한 폭력만 내포했다고 볼 순 없다며 폭력성을 제거하고 감상하면 축제에서 느낄 만한 유희만 남는다는 견해를 보인다. 이 장면은 작품의 자기 지시이자 은연중 관객에게 제시한 감상법이다. 미국의 세속적 낙관주의의 은유인, 자동차 충돌로 빚어낸 물리적 폭력의 이미지를 일종의 놀이처럼 느끼는 것과 동일하게, <화이트 노이즈>에서 등장한 재난과 폭력도 모종의 파국으로 관객을 인도하기는커녕 희망과 낙관의 정서가 일관되게 기입돼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에서 드러난 재난과 폭력은 잭에게는 실재일지 몰라도 관객에게는 머릿속 놀이다. 결국 이건 작품이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나들며 관념 속 폭력으로 회귀해 유희와 쾌락의 소비재로 생명을 이어가는 현상의 유지다. 그렇다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원작 소설의 공인된 주제라 할 만한, 시뮬라크르 추종, 물신숭배, 천박한 대중문화, 기술문명 맹신 등을 향한 비판의 대상으로 환원한다. 소설과 영화는 언어가 다르므로 일대일로 구현한다는 건 어폐가 있고, 원작을 영화화한다고 해서 원작의 주제와 정신을 계승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원작이 비판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가 원작을 품고 있다는 점은 기묘하다.

국내 굴지의 포털 사이트 한곳은 감독의 초기작 <오징어와 고래>부터 대중작 <프란시스 하>, 근작 <결혼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대표 작품들을 모두 코미디 장르로 구분해놓았다. 장르 식별의 비전문성이나 게으름을 탓하는 데 힘을 쓰고 싶진 않다. 다만 무리한 공상을 하자면 지금까지 코미디로 분류해놓은 건 <화이트 노이즈>를 본의 아니게 예견하며 마련한 포석처럼도 여겨진다. 작품이 명백하게 코미디 장르라는 말은 아니다. 재난과 폭력의 스펙터클을 압도하거나 무화시키는 정체 모를 가벼움과 키치가 희극에 가까운 건 사실이기에 그렇다. 희극을 두고 비극이라 부를 순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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