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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필모그래피를 통해 김현주 배우론
김소미 2023-01-26

사진제공 넷플릭스

자신을 죽게 한 전투로 돌아가 성공할 때까지 무한히 반복한다는 점에서 정이(김현주)는 확실히 디스토피아에 산다. 복제에 지불하는 비용에 따라 인간이 자기 고유성을 보존하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정이>의 상상력은 전사한 싱글맘 용병의 모친이 혼자 남은 손녀(박소이)를 위해 자기 딸을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만든다. 정이 캐릭터에 입각해볼 때 이 영화는 홀로 생계를 건사하는 여성의 노동영화 <풀타임>(2021)의 AI 버전이기도 하다. 죽음의 루프에 갇힌 정이의 전투가 어쩐지 서글픈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따져보면 인간 윤정이는 오리지널 AI로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용병이지만, 가족의 생존을 위해 사후에도 그야말로 지옥에 처하는 절박한 여성 가장이라는 사실에서 극단적 두 얼굴의 소유자다.

“나보다 액션을 잘하는 배우는 많을 텐데, 왜?” 생애 처음 전사가 될 기회 앞에서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뒤로하고 스스로 자문했던 배우 대신 ‘김현주여야 했던 이유’를 답해보자면 이렇다. 일찍이 여성배우들이 고난도 액션 연기에 도전하는 KBS 2부작 예능 프로그램 <레이디 액션>(2015)에도 출연한 적 있는 김현주는 드라마 <파트너>(2009),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등을 거치며 신체 훈련의 시동을 건 뒤 <정이>에서 비상한다. 사운드를 채우는 촘촘한 대사와 감정의 농도가 중요한 TV드라마에서 갈고닦은 장기를 벗고 갑옷을 입은 그는,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포효하는 존재로 깨어났다.

사진제공 SBS

<정이>의 정이가 상징이라면 <트롤리>의 혜주는 인물을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사건과 과거의 비밀까지 얽혀 빚어진 아주 구체적인 개인이다. 겹겹의 불운과 딜레마에 파묻힌 그는 시청자로 하여금 할 수만 있다면 기계 장치의 신이 되어 구원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다. 단번에 빈틈없이 설득하기보다 내면의 궤적을 따라 찬찬히 들여다봐달라고 주문하는 내향형의 서사이기에 <트롤리>의 배우는 많은 무게를 짊어진다. 빨리 감기의 시대에 시청자를 기다리게 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지만 김현주에겐 그런 힘이 있다. 요컨대 김현주의 행보가 대중에게 각인한 인상- 꾸준함, 현명함,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강단- 은 그가 맡은 캐릭터에도 영향을 미쳐, 인물이 작가의 결정적 한방을 수행하기 이전에도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현실감 있는 존재이리라 믿게 한다. 직업이 책 수선가이나 자기 삶을 고치는 방도엔 묘연한 여성을 연기하면서 김현주는 웅변할 기색을 지움으로써 딜레마의 본질에 한층 다가간다.

1997년 노희경 작가의 미니시리즈 <내가 사는 이유>에서 건방진 술집 종업원 역할로 데뷔한 김현주는 당대에 사랑받은 여성배우들처럼 청순가련한 매력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환하게 웃을 때 특히 얼굴의 절묘한 양감이 부각되어 순정만화 그림체처럼 해사해지는 이 배우의 외모적 특성은 그 안에 숨은 당돌함과 고집, 혹은 진심을 알기 힘든 조숙함과 더불어 매력을 배가했다. 꺼질 줄 모르는 마음의 불씨를 품고 살아가는 <토지>의 서희를 기점으로 김현주는 배우의 일을 지속한다는 것에 대한 길고 괴로운 질문에 자기만의 대답을 구해왔다. ‘유리구두’ 신은 아가씨는 이후 생활력 강한 21세기 전문직 여성으로 변모해가면서 흔한 부침과 구설 없이 한국의 TV 시청자들이 가장 잘 알고 신뢰하는 70년대생 여성배우의 대표 격으로 자리 잡았다.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2013) 속 야심 넘치는 궁중의 악녀, 아버지의 불효 소송에 휘말린 <가족끼리 왜 이래>(2014)의 장녀, 성격이 판이한 쌍둥이를 1인2역으로 연기한 <애인 있어요>(2015)는 김현주라는 브랜드의 정점을 구가하는 작품들이다. 지금 특기할 만한 것은 그 이후의 김현주다. 트렌드의 첨단 대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신중히 택해온 것처럼 보였던 연기 생애를 종합하니 그가 언제나 유행의 선두에 있었다는 사실을, OTT 시리즈와 SF 장르의 주역이 된 이 배우는 새삼 일깨운다.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자주 언급한 것은 두려움과 향상심 사이에서 진자 운동하는 마음의 모양이었다. 집착은 내려놓되 지속을 택하는 방식으로 매너리즘과 겨룬 그는 당대가 배우에게 바라는 최선에 자신을 맡겼다. 이제 동시대의 김현주는 장르물과 여성 서사의 부흥에 힘입어 <왓쳐>(2019), <언더커버>(2021), <지옥>(2021), <정이>(2022)에서 변호사 혹은 전사의 모습으로 디스토피아와 싸우고 있다. <지옥> 시리즈와 <정이>, 현재 촬영 중인 <선산>까지 연상호라는 한명의 감독과 연속적으로 협업하는 완전히 새로운 패턴까지 채색하면서.

사진제공 JTBC

사진제공 O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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