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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퇴행징후 5가지
2001-03-26

새벽에서 황혼으로, 뒤로가는 한국영화

죽음에의 집착, 지워진 가족, 강박적 유머, 가학과 엽기

■최근 한국영화에 만연하는 퇴행의 코드들

의아스러운 점은 갑자기 한국영화가 빈곤해져 버렸다는 점이다. 1998년에 나온 화제작들의 목록만 적어봐도 상황은 너무 명료해진다. <강원도의 힘><조용한 가족><여고괴담><기막힌 사내들><퇴마록><정사><처녀들의 저녁식사><아름다운 시절><미술관 옆 동물원>.

대부분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문제는 흥행성적이 아니다. <강원도의 힘>만 빼면 놀랍게도 모두 신인의 데뷔작인 이 영화들은 나올 때마다 관객과

비평가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의미지만 발견의 기쁨을 선사했다. 신인의 비중은 다소 줄었어도 1999년에도 이런 추세는 지속된다. <박하사탕><반칙왕>으로

떠들썩했던 2000년 상반기가 지나자 갑자기 어두워졌다. 여름부터 더 크고 더 많은 영화들이 쏟아졌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를 제외하면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된 화제작도, 발견의 기쁨을 준 문제작도 찾기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장르영화의 후진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지난 여름의 공포영화 네편은 하나같이 <여고괴담>이나 <조용한 가족>의 재미에도 만듦새에도

미치지 못했다. <싸이렌><리베라 메><단적비연수> 같은 대작들도 줄을 이었지만, 어느 것도 <퇴마록><쉬리><유령>의 대중성과 개척자적

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여기에 올해 소개된 <천사몽><광시곡>을 나란히 놓으면 암담할 지경이다. 가을부터 소개된 멜로드라마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정사><처녀들의 저녁식사><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이어진 1998년의 다양한 개성의 멜로에 비하면 최근의

멜로영화들은 이야기의 풍성함에서도 연출의 창의성에서도 한참 뒤떨어진다.

물론 상황 탓일 수도 있고 단기적 부진일 수도 있다. 거장이라도 걸작으로만 필모그래피를 채우진 않는 법이니, 특정한 감독이나 프로듀서를

탓할 일도 아닐 것이다. 정말 우려스러운 것은 최근 영화들이 일종의 정신적 퇴행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데올로기나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유령>은 매우 국수적이고 극우적인 이데올로기를 드러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기술적 한계에 도전했다는

점과 함께 남성 캐릭터 영화의 한 경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최근 한국영화들의 진짜 문제점은 정신적 퇴행의

징후들이 이야기 및 캐릭터의 빈곤화와 긴밀하게 결부돼 있다는 사실이다.

<씨네21> 289호에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최근 한국영화가 사소한 것에 대한 질문, 죽음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의 발언은 이런 의구심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현실과 대면할 의지의 상실이 내러티브의 빈곤을 낳고, 그 빈곤을 메우기 위해 죽음이라는

극단적 모티브를 남용하거나 사소한 것에 매몰된다는 것이다. 정성일씨가 지적한 두 가지 요소 외에도 가족의 부재, 강박적 유머, 가학과 엽기가

정신적 퇴행성과 빈곤한 내러티브의 접점에 있는 요소들이라는 점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 요소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최근

한국영화에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섯 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어디서 비롯됐는지 살펴보는 일은 오늘의 한국영화가 놓인 자리를 바라보는 하나의 준거를 마련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여기 실린 글들이 단정적 비판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한다. 대중영화에 고도의 예술성이나 특정한

사회적 책무를 요구하는 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좀더 풍부하고 좀더 다양한 개성의 영화들을 보고 싶어하는 건, 영화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영화는 현실에 보다 다가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 박평식씨의 말대로 ‘현실’처럼

매력적인 단어는 많지 않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