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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1 - 죽음에의 집착
2001-03-26

픽션 속 공허한 유희에, 소멸하는 현실

90년대 중반의 일본영화에 대해 일본의 어떤 평자들은 이른바 ‘사인(死人) 영화’라는 것이 당시 한 가지 중요한 트렌드를 이루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영화들, 예컨대 이와이 순지의 <러브 레터>(1995)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

그리고 오구리 고헤이의 <잠자는 남자>(1996) 등이 하나같이 ‘부재하는 사자(死者)’와 어떤 식으로든 합일을 이루려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가미카제 영화’들

최근 나오는 한국영화들을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이와 꼭 같지는 않더라도 죽음에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한다는 하나의 특징적인 양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앞서 이야기한 일본영화들과 어떻게 다른가부터 먼저 지적해보도록 하자. 단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몇몇 한국영화들은 죽음에의 이끌림에서, 부(負)의 미학을 전통으로서 지녀왔던 일본영화들보다도 더 강렬했으면 강렬했지 결코

미약하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일본의 사인영화들이란, 비록 일본적 자연을 매개로 한 것이긴 해도 주인공이 누군가 중요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회복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들이었다. 반면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오히려 주인공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쪽을 향한다.

그들은 죽는다는 것에 대해 별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아무튼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대부분 죽음을 자신의 운명으로서 기꺼이

묵종한다. 그러니까 일본의 사인영화들이 ‘자연사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데 반해, 그것의 대응물과도 같은, 죽음에 매달리는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돌발사(돌발적인 자살) 영화’ 또는 ‘가미카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하다. 물론 한국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죽음을 스스로 결행한

게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란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략 10년 주기로 그 대표적 인물들을 한번 떠올려본다면, 60년대엔

사랑을 이룰 수 없어 다음 생을 기약했던 <맨발의 청춘>(1964)의 두수(신성일)와 수잔나(엄앵란)가 있었고, 70년대엔 예쁜 고래 한

마리를 잡으러 바다로 뛰어든 <바보들의 행진>(1975)의 영철(하재영)이 있었으며, 또 80년대엔 숨막힌 학교에서 벗어나려 투신자살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의 은주(이미연)가 있었다. 90년대엔 또 어땠던가. 나이트클럽이나 뒷골목을 누비던 영화 속 깡패들은

대개가 무모하게도 폼나는 종말을 향해 뛰어들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지금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이 너나할 것 없이 한꺼번에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이런 사태는 아마도 한국영화사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최근 한국영화들을 보면 누군가는 관객의 도덕적 분별력을 굳이 만족케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자살하고(<공동경비구역 JSA>), 누군가는 영화 속 다른 주인공을 성장케 하려고 거의 억지로 자살하며(<청춘>), 또 누군가는

사랑의 실패로 인한 애련의 정서를 공유케 하려고 자살한다(<번지 점프를 하다> <물고기 자리>). 어쨌든 요즘의 한국영화는 대개 누군가는

꼭 죽음을 껴안아야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강권하는 영화들

이런 현상을 일종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처럼 죽음이 미만해 있고 또 확장돼 있기(이를테면, 최근에 나오는

수많은 뮤직비디오에까지 퍼져 있을 정도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 속 죽음의 순간이 내러티브 속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는

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어떤 죽음의 순간은 내러티브상의 ‘비약’을 감수하면서까지 찾아온다. <번지 점프를 하다>의 인우와 현빈은

뉴질랜드까지 함께 가서 굳이 구명대 없는 ‘번지점프’를 해야 했을까? 마치 <와호장룡>의 마지막을 재연하는 듯한 그 장면은 꼭 우리에게

비련의 정서를 느껴보라고 강권하는 것 같아 적잖이 불편하다. 또 어떤 죽음의 순간은 내러티브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출발점 같아

보인다. 예를 들어 <친구>의 경우,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준석의 다가올 죽음이 있고 그것에 앞선 내러티브의 전개는 아예 죽음이라는 그

특권적 순간을 위해 이리저리 끼워맞춰져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이 내러티브의 논리를 훼손하고 또 내러티브의 전개를 그 아래 복속하도록 만들게 된 그 이유는 매우 자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화해 보자면, 아마도 그건 주인공이 죽음을 향해 돌진하거나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 순간이야말로 관객에게 어떤 미적·감정적

희열을 전달해줄 수 있다는 논리의 산물일 것이다. 이 영화들이 제시하건대, 죽음의 순간은 영화 속에서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한국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전적인 범주로 말하자면 진·선·미 가운데 미, 그리고 지(知)·정(情)·의(意) 가운데 정이라는 범주다.”(사실

이건 원래 일본의 평자들이 최근의 일본 영화감독들에 대해 진단하면서 쓴 문장이지만, 최근 한국의 많은 영화감독들에게 대입해봐도 신기하게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렇게 말하면 상업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무얼 바라느냐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지만, 관객으로서 지성과 윤리의

문제와 대면하는 ‘다른’ 영화들도 좀 보자고 말하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일까?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의 죽음처럼 진과 의를 어느 정도

끌어안는, 매우 희소한 경우도 있다는 걸 상기해 보자.

요즘의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사라짐’에 대한 애상의 정서는 분명히 피상적인 것이다. 대부분 그것은 <친구>에서처럼 아련한 노스탤지어이거나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처럼 기묘한 나르시시즘이거나 아니면 <청춘>에서처럼 소구력 없는 억지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영화들은 그토록 피상적인

죽음에 몰두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여기에 대답하기란(특히 비평적인 대답을 내놓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회학적인 반영론을 개진할

수도 있고 또 심리학적인 설명을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영화적인 영향 관계, 즉 현재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제작자들과

감독들, 시나리오 작가들 등)이 어떤 영화와 영화관(映畵觀)을 흡수했는가에 한정해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난해 잠시 불붙었던 호러영화의

붐이 사회적 불안감보다는 영화 제작상의 트렌드와 더 직결되는 것처럼, 사실 죽음에 대한 집착이라는 이 현상 역시 영화 외적인 컨텍스트보다는

만드는 쪽 사람들의 영화적 영향관계와 더 관련있다고 본다.

사색도 대결의 의지도 없는 죽음

주로 80년대 학번들인 최근 감독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적 ‘흐름’은, 아주 단순화하자면 두 가지 정도로 모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 첫 번째로는 비디오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 세대들에게 몰아닥친 홍콩영화들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건 최근에 나온 한국영화들이 아직도

80년대의 이른바 ‘홍콩누아르’를 모방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국내에서 여전히 ‘홍콩누아르’를 재생산하는 쪽은 뮤직비디오 분야이다. 그것들에서

클론의 구준엽은 <첩혈쌍웅>의 킬러 주윤발을 모방하고, 또 조성모는 <열혈남아>의 장학우 같은 역을 맡는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공허하도록

‘멋지게’ 최후를 맞는다). 단지 젊은 감독들에게 나르시시즘적인 죽음이 정말 황홀하다는 점을 제대로 가르쳐준 것은 ‘주윤발’일 공산이 크고,

이제는 그들이 주윤발의 영웅적인 최후를 거의 ‘내면화’하는 단계에까지 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리를 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

강박증에 대한 두 번째 주요한 영향력은(우리가 흔히 ‘누벨 이마주’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시네마 뒤 룩’(cinema du look)이라는

영화적 흐름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식적인 절망의 몸짓을 자극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치장한 이 영화들이 한국의 많은 영화 지망생들에게

가르쳐준 교훈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 영화에서 비주얼이 이야기하기에 비해 우월하다는 믿음, 그리고 스토리텔링의 열등함에 대한

오도된 신념. 이것과 현재의 결과에 대해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기가 무리인 듯도 하지만, 어쨌든 (특히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에 엄청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영화인이 드문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야기를 주조하는 데 애를 먹을 때, 그러면서도 어쨌든 감동은 주고 싶을

때, 일종의 편법처럼 이용하는 방법이 무엇이 될 것이라는 건 뻔한 이치다. 그건 주인공을 멋있게 죽이는 것이다.

끝으로 앞서 제시한 영화적 영향관계에 대한 짧은 논의는 잠정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야 할 듯싶다. 그래도 죽음에 집착하는

최근 한국영화들에 대해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픽션 속의 죽음과 공허하게 유희를 벌이는 동안 현실과 대결할 의지는 거의

없어져버렸다고. 쇼펜하워는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던들 인간은 철학적인 사색을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카뮈는 “자살한다는

것은 ‘쉽사리 지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영화에선 죽음과 자살이 넘쳐나지만, 사색도 없고 대결의 의지도

없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