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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이상한 경향, 코드3 - 오인된 일상성
2001-03-26

사소한 것들,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개봉됐을 때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온 네티즌들의 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 호평들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정말 영화 같지 않다”, “이거 영화 맞아?”, “이거, 내 얘긴데…”. <나도 아내가…>를 본 사람이라면 이 말들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사소한 에피소드와 자잘한 유머의 전시장이다. 끝날 때쯤 남녀주인공이 연애를 시작한다는 것말고는 두 시간 내내

어떤 극적인 일도 이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꿈이고 신화라면, 그래서 일상에 지친 대중을 비일상적인 볼거리로 달래주는 오락이라면,

<나도 아내가…>는 그런 축에 못 낀다. 시간 내고 돈 들여 굳이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관객도 비평가도 이 영화를 좋아했다.

"일상 포착은 이제 그만"

물론 비판도 있었다. 흥미로운 건 비판의 이유가 호평의 이유와 같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낼 능력이 모자란 감독이 배우들 뒤로 숨어버린

영화”,"나무는 있으나 숲은 보이질 않았다” 등이 그렇다. “일상 포착은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으로 한 네티즌은 이런 평을 올렸다. “‘어떻게

이렇게 세심할 수가!’라고 순간 감탄하고 거기에 울고 웃으면서도 지나고 보면 재밌는 에피소드 모음집을 한편 본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일상에 집착하는 영화’가 연달아 만들어짐에 따라 더해간다.”(elijekim)

이 평자가 ‘일상에 집착하는 영화’라고 부른 한국영화엔 <순애보> <불후의 명작>이 포함된다. <나도 아내가…>에 대한 비판론은 <하루>와

<선물>에도 적용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봄까지 차례로 개봉된 이 다섯편의 영화는 멜로드라마라는 것말고도 공통점이 있다. 칭찬과 비판이

향하는 같은 지점은 이 영화들이 모두 ‘일상적’이라는 것이다. <나도 아내가…>는 별나게 야쿠르트 먹는 법, 개 짖는 소리, 혼자 자다

무서울 때 대처 요령 같은 사소한 얘깃거리만으로 두 시간을 이끌어간다. <순애보>는 마지막 장면의 남녀의 해후만 빼면, 심지어 실없는 농담도

없이 한국 청년과 일본 처녀의 일상을 현미경처럼 관찰하는 데 몰두한다. 다른 세편은 에로비디오 제작, 무뇌아 임신, 아내의 불치병이라는

극적 모티브를 도입하고 있지만 사소한 일상을 전시하는 데 이상할 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불후의 명작>에선 주인공이 친구와 차를

마시는 장면에서 초콜릿 파는 아주머니의 등을 관객은 별다른 이유없이 꽤 오래 쳐다봐야 한다. <>의 오밀조밀한 리듬감은 같은 감독이 만든

<하루>에선 거의 사라지고, 카메라는 너무 자주 창문 밖에서 물끄러미 주인공의 집을 비춘다. 아내가 불치병에 걸린 <선물>조차도 가파른

사건 대신 사소한 유머가 들어차 있어, 경쾌한 리듬이나 극적 구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이런 경향을 일상성이라고 부른다면, 일상성은 언제부터인지 한국영화의 미학적 유행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 유행은, 모든 유행이 그렇듯

추종자들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사소한 것에서 갖가지 에피소드와 우스갯소리를 뽑아낼 것, 극의 흐름은 절제의 이름으로

잔잔하게 갈 것, 시대상은 가능한 무시하고 순진한 척 굴 것 등이 그것이다. 시대상 같은 골치 아픈 쪽은 외면한다 해도, 왜 관객이 원한다고

알려져온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것이 기피되고 있을까. 이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맥락을 보면, 일반 관객의 기대를 개의치 않는 예술적 지향성이

압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일상성의 미학이란 이름 대신, 사소한 것에 대한 집착, 혹은 쇄말주의(trivialism)로

부를 만한 경향이다.

영화에서 일상성이란, 통념과는 달리 이른바 예술영화나 특정한 장르영화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영화가 타고 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가 개인이

영위하는 생활의 구체적 계기를 담는 한 그렇다. 이건 소설이 가진 유전인자와 동일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상성이 전무한 영화는,

일상적인 것과 가장 멀어보이는 판타지 장르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들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해리슨 포드가 사는 어둡고 너저분한 아파트와 그가

시장에서 먹는 일본식 우동, 악귀처럼 떠다니는 거리의 네온사인들은 미래사회의 일상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한국현대사의 상처와 정면대결한

<박하사탕>조차 놀라울 정도로 일상적인 것들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역사와 영화>에서 마르크 페로가 설명했듯이, ‘역사의 고아’였던 일상생활사를

역사 연구의 중심주제로 올려놓은 아날학파가 영화를 역사적 정보의 광맥으로 취급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상성'이 아닌 '쇄말주의'

우리의 영화담론에서 간혹 등장해온 ‘일상성의 미학’은, 얼마간의 오해에 기반한, 그래서 그 적절함이 의심스런 용어다. 그것이 최초로 지칭한

것은 일상적인 소재나 일상적인 정조가 아니라, 특별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등장 이후다. 한국영화계가 고전기 할리우드의 문법을 이젠 세련되게 구사하게 된 것에 자족하고 있을 무렵, 홍상수는 난데없이

그를 맹공하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 그의 타깃은 기존 영화의 비일상성이 아니라 ‘환영(幻影)주의’였다. 홍상수의 영화보다 훨씬 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붙들고 있는 주류 영화들도 많았다. 홍상수는 똑같이 일상적인 것들을 동원했지만, 그것의 전면적 재구성을 통해 관습적 드라마의

형식에 갇혀 있는 의식의 각질을 집요하게 가격했던 것이다.

만일 <나도 아내가…>에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를 쓴다면, 그 순간 이 용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홍상수의 영화와 <나도 아내가…>는

모든 면에서 거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에피소드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에피소드를 결합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은 재완과 속초 공항에 앉아 먼산을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 “저 산에 사람들을 가득 채우면

한 몇명이나 들어갈까?” “꽤 많이 들어갈걸.” “한 백만은 들어가지 않을까?” “백만이요? 그렇게 많이 들어갈까?” <나도 아내가…>에서

원주는 나무 아래 앉아 봉수와 야쿠르트를 까먹는다. “전 요새 거보다 애기 때부터 먹어서 그런가 이게 훨씬 좋아요. 껍질이 잘 안 벗겨져서

그렇지.” “그냥 이빨로 구멍내서 드세요. 그게 더 맛있어요….하나 더 드려요?” “아니 됐어요. 더 달라고 그런 거 아닌데.”

실없는 소리이기는 똑같지만, 두 대화가 놓인 자리는 완전히 다르다. 상권과 재완의 대화는 두 인물의 성격이나 앞뒤의 사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인물의 심리적 일관성과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지워간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모든 에피소드들은 결국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증발시키고

스스로도 사라져버린다. <강원도의 힘>에서 마지막으로 남는 건 어떤 인물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의미도 명분도 없는 부조리한 삶의 육중한 실재감이다.

<나도 아내가…>는 반대로 캐릭터와 이야기를 조금씩 완성해나가는 쪽이다. 봉수는 엉뚱하고 음험한 듯 순진한 노총각이며, 원주는 푼수끼 있지만

착하고 여린 노처녀다. 둘은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겪으면서 결국 연애라는 고지에 도달한다. 전통적인 드라마의 범주를 궁극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형식도 이데올로기도 상반된 영화를 '일상성의 미학'으로 묶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일상성의 미학’이 다소 오해된 채 하나의 유행이 됐다면 원조는 홍상수의 영화보다 주류영화의 한계까지 다가간 일

가능성이 높다. 멜로적 관습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어떤 멜로보다 묵직한 비애를 길어올린 의 길고 느린 리듬과 빈 공간의

중시를 최근의 멜로에서 찾아보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물론 어느 영화도 원조의 경지 근처에도 못미쳤지만.

소재로서 일상, 혹은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은 나무랄 게 못된다.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제3세계 영화인으로서의

자의식에 연관돼 있다. 따지고보면, 홍상수 영화의 ‘일상성’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의 예술성을 사회비판성이나 정치의식과 동일시해온 비평계

혹은 한국 지식인사회의 관성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제1세계와 제2세계의 부산물이나 피해자로 포착하는 전도된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선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체로서의 자기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는데, 이 필요성이 일상성에 대한 천착을 낳는다. “사소한 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선 정치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로빈 우드의 신념을 역으로 실천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선 80년대식 정치주의의 반지성적 요소를

해독하는 데 불가피한 경로였다.

사소한 것에서 부터 주체를 재구성하려는 영화적 시도는 고통스러운 일이며, 때론 절망적이다.<강원도의 힘>은 누구도 흉내못낼 엄격한 형식으로

주체성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일상의 상처가 기억을 호출한 <박하사탕>은 그것이 치유뷸눙송울 벌굔허자먼 꿈의 이미지로나마

온전한 주체성 회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순애보>는 일상에서 주체성의 상실을 끈질기게 응시하다가, 멜로의 관습을 판타지로 변형시킨

이상한 결말로 빠져나간다.

윤리적,산업적으로도 불길한

문제는 성찰의 고통과 거리가 먼 대중영화들도 사소함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이다.물론 더 많은 유희를, 그리고 성찰과 유희를 관류하는 공감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는 건 앙상한 컨셉트와 스타의 얼굴뿐이다. 이건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소박함을 가장한 의식의 빈곤이며 이야기의 왜소화다.

정갈하고 섬세하다 해도 <나도 아내가…>는 아주 작은 일에도 웃음과 행복이 있다는 TV적 전언의 연장일 뿐이다. 그냥 지나쳐온 사소한 것들의

재미를 발견하는 기쁨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불후의 명작> <하루>와 <선물>은 소재만 새로울 뿐, 그런 기쁨조차 선사하지

못한다. 그냥 하나의 갈등을 던져놓고 스타의 힘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다. 시대상은 물론이고, 사회적 관계, 친족 관계도 슬쩍 지나칠뿐 본론에

가담하지 못한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만 그것에서 새로운 의미와 재미도 굴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쇄말주의는 윤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산업적으로도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