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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지루함, 따분함, 무의미함,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세기 유럽의 시각을 결정지은 두 가지 질서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에 있다. 영화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필름 카메라를 매개로 삼는 특권적인 재현 체계라면, 절멸의 수용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기록을 은폐하고 소각한 체계적 기관이다. 한쪽에선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한쪽에선 이미지를 말살한다. 영화가 역사를 창조한다면,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구멍을 낸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체계는 그러나 유사성을 공유하면서 대립한다. 영화와 강제수용소는 바깥에 있던 세계를 내부로 가져와 관측하고 분류하고 조정하는 절차로 형성된다.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과 열차의 도착을 상징적 기원으로 삼는 영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열차로 실어 나르며 노역과 학살을 강제한 강제수용소는 제국주의의 열망이 깃든 발명품이자 세계를 포획하는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표상과 기록장치로서의 영화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수용소 내부의 이미지는 영화에 남겨진 공백 지대다. 그러나 어쩌면 영화는 어떤 것보다 가까이에서 수용소와 긴밀하게 접속하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의 움직임을 포착해 프레임에 각인하는 영화의 매혹은 현존하는 세계의 재현 자체를 전면 중단시킨 강제수용소의 학살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를 바로 그 결합의 장소로 옮겨둔다. 이 영화는 학살이 자행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담장 건너편에 있는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저택에 카메라를 둔다. 영화의 초반, 회스가 눈을 가린 채 정해진 구역으로 이동해 가족들의 선물을 받는 장면은 수용소에서 수감자를 관리하는 방식과 동선을 떠올리게 한다. 강제수용소의 학살은 부르주아 가정의 익숙한 생활과 ‘나란히’ 놓여 있다. 기나긴 강제이주, 벌거벗은 몸, 가스실에서의 죽음, 딱딱하게 굳은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잿가루. 강제수용소가 생산하는 적나라한 이미지들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카메라가 놓인 저택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저택을 촬영하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의 참극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미지의 조건에서 분리되어 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초반부 한 장면에서 앙각으로 잡힌 루돌프 회스의 얼굴 뒤로 수용소에 도착한 기차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화면 바깥에선 수많은 사람의 비명이 들린다. 그런데 다음 장면이 되면 우리가 바로 직전에 보고 들은 회스의 무표정한 얼굴과 검은 연기와 끔찍한 비명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 화면이 떠오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참극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수용소 관리자의 무표정과 불타오르는 연기와 보이지 않는 자들의 비명을. 하지만 강제수용소에 자리 잡은 영화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눈앞에 나타난 이미지와 사운드는 너무나 쉽게 소멸한다. 두 장면은 연속적인 시공간 위에 결합해 있는 걸까? 별개의 장면으로 분리된 걸까?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화면은 직전 장면에 보이던 대상이 사라진 상태일까? 아니면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장소를 추상화하는 독립된 숏인 걸까? 조너선 글레이저가 홀로코스트의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이 질문의 구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강제수용소 중심부에서 20세기 영화의 또 다른 전통적 기억을 깨운다. 그건 대가족의 홈 드라마다. 설정의 구체성을 소거하고 줄거리만 요약한다면, 이 영화는 아버지의 전출로 인해 가족이 흩어졌다가 다시 재회하는 20세기적 홈 드라마다. 다만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의 기획자이고, 그들이 재회하는 장소는 아우슈비츠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장소 옆면에 소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적 시간을 접속시킨다. 그들의 일상은 낯설거나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배급받은 식료품으로 식사하고, 정원을 가꾸고, 수영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정해진 잠자리에 든다. 회스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은 카메라 사이를 오가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 있는 행위도 보여주지 않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런 맥락에서 놀라움과 충격의 혁신성을 겨냥한다기보다는 철저할 만큼의 지루함, 무의미, 따분함의 상태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영화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10여 대의 카메라를 촬영장 여기저기에 배치해 동시에 녹화한 뒤 동선에 맞춰 이어붙인 이 영화의 화면은 의지적인 개입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영화 전체를 자동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기관처럼 관측하도록 한다. 이 자동화된 화면 위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를 철두철미한 감각적 상투성으로 장식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논점은 지루하고 무의미하고 따분한 화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루하고 무의미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머물 수 없다는 조바심이 영화를 미심쩍게 만든다. 그 조바심은 경이로운 테크닉으로 세공된 화면 바깥의 소리에 있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극화에 반대하고 수용소의 학살을 스펙터클로 수용하는 재현에 저항하는 시각화를 구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화면에는 놀라운 기술력으로 극화에 기여하는 강제수용소의 소리와 음향의 스펙터클이 존재한다. 이 가공할 만한 소음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실천하는 시각적인 재현 양상과 반대로 향한다.

시각은 강제수용소 전체를 재현하려는 열망에서 물러나지만, 청각은 물리적인 거리감을 뛰어넘은 허구적 조정으로 강제수용소 전체를 재구성한다. 이는 물론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라는 익숙한 형식적 장치다. 그런데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격차를 발생시켜 감각을 교란하는 화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구현될 때, 이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불일치인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시각적 재현은 가까운 것(회스 가족의 일상)을 심리적으로 멀리서 관측하도록 요청하고, 청각적 재현은 멀리 있는 것(강제수용소의 죽음)을 가까이 듣도록 강조한다. 이 불일치는 전자의 의도를 역설하는 연출자의 의견과 반대의 질문으로 향하게 한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화면은 아우슈비츠 재현이라는 뿌리 깊은 영화사적 논제의 시각 중심주의에 붙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고다르를 비틀어 다시 말하자면, 아우슈비츠의 ‘소리’는 영화에서 한 번도 정직하게 재현된 적 없다. 학살의 소리는 허구적으로 부풀려지거나, 원래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온다.

화면이 철저한 수준의 지루함에 복무하며 전체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동안 소리는 관객의 경험에 계속해서 호기심과 자극과 이해를 제공한다. 이 영화가 자동화된 카메라의 작동과 동시적으로 이어지는 숏 구성을 통해 객관적 관찰을 시도한다면, 날카롭게 세공된 소리의 허구적 효과는 관객를 주관적 감각에 동참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논쟁적인 감각일 순 있지만, 찬미할 만한 아름다움도, 경이로운 혼란도 아니다.

회스는 두 남매를 데리고 주변의 강가에서 낚시를 즐긴다. 물놀이하던 아이들은 서로에게 말한다. “재미없어” / “니가 더 재미없어.”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의 말에 이 영화의 깊은 형식적 자의식이 새겨진다. 아이들은 지루함을 느낀다.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는다. 따분하고 아무 자극도 없는 시간을 보낸다. 가족은 지루하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면은 그 지루함을 찍는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그 지루함을 깨트리는 건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학살의 잔해다. 회스가 낚시를 하다 강물에 떠내려오는 뼛조각을 발견하고 기겁한 채 집에 돌아와 오염물을 아이들의 몸을 씻어낸다. 강제수용소에 사는 부르주아 가정의 지루하고 따분한 상태를 부수는 건 아우슈비츠의 뼛조각이다. 불순한 인상이지만 이 충격적인 자극은 회스 가족의 화면에 왠지 모를 활기를 덧대는 것 같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이 문장에서 ‘회스 가족’의 자리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바뀌어도 무방하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금욕적이고 기계적인 숏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바깥의 자극을 요구하고 끌어들이는 텅 빈 매개로 다가온다. 그 매개의 중심에 루돌프 회스의 몸이 존재한다. 바깥에서 홀로코스트의 잔여물이 밀려 들어오자, 회스의 몸에선 자꾸만 무언가 빠져나온다. 그는 낚시에 갔다 와서 세면대에 검은 파편을 뱉고, 의사에게 검진받으며 하루에 배출하는 대소변의 빈도를 말한다. 결말에서 승진과 아우슈비츠 복귀를 약속받은 회스는 계단을 내려오다 헛구역질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제 그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토사물은 없다. 이는 미래를 향한 불안한 암시 따위는 결코 아니다. 강제수용소의 비명도,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반응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의 도달이다. 이제 따분한 내부를 자극할 수 있는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으로 물든 텅 빈 화면에 루돌프 회스의 텅 빈 몸이 걸어가는 순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결말의 ‘무의미’를 실현하기 위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폐허가 돼버린 홀로코스트 현장을 렌즈에 담은 <밤과 안개>를 완성한 이듬해 알랭 레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다룬 <세상의 모든 기억>을 만든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공동체의 집단 기억이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치명적인 유사성은 도서관(혹은 박물관)과 강제수용소가 무척 흡사한 원리로 작동된 유럽적 기관이라는 데 있다. “박물관의 아이”를 자처한 고다르는 19세기의 박물관과 20세기의 강제수용소를 나란히 병치한다(고다르에겐 그 중간지대에 영화관이 존재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또한 결말에서 두 개의 장소를 교차한다. 하나는 20세기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이다. 개장을 준비하는 박물관의 청소 노동자들은 시체를 소각한 구조물과 남겨진 강제수용소의 흔적과 사물을 보관하는 유리를 꼼꼼히 청소한다. 누군가는 회스와 관리자들의 관료주의적 절차에 대항하는 육체노동의 실존, 강제수용소의 잔혹한 노동과 비교되는 현대의 노동과 노동자를 옹호하는 결말로 읽을지 모른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회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복귀 명령을 받았듯이, 해결되지 않은 강제수용소의 원리가 현재에 침입해 되돌아올 것이다. 현대의 문화와 자본은 아우슈비츠의 질서를 ‘정상적으로’ 연장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곳은 노동의 장소이고, 보관의 장소이며, 관리의 장소이다. 그런데 괄호 쳐진 이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아우슈비츠 역시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영화관이며 박물관이자 강제수용소인 바로 그 자리. 영화는 그곳에 없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 장소의 좌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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